박남희 시인 / 일몰의 배후
갈대는 배후가 없다*는 것도 옛말이다 모든 어두워지는 것들에게는 배후가 있다
신은 아프리카를 왜 어둠의 대륙으로 만들었을까 처음부터 어두워서 표정조차 함부로 저물 수도 없는 종족, 잠베지강은 알고 있다 흘러흘러 물로 말을 해도 아무도 들으려 하지 않는 막힌 귀의 배후를,
그 즈음에 태양은 제 빛의 무거움을 느낀다 우기에 무성한 것들은 빛에 한없이 약하다 말라리아를 풍토병이라고 말하는 이들은 모른다 풍토병의 배후에 어둠이 있다는 것을, 그리하여 모든 어두워지는 것들에게는 배후가 있다
병풍의 배후에 숨어있는 죽음을 다만 십장생도가 가리고 있을 뿐이다
죽음을 생각하면 불현 듯 등이 가렵다 나이가 먹을수록 등이 가려운 이유를 효자손은 모른다 효자는 없고 손만 남은 시대에 등은 긁을수록 더 가려워지는 법이어서 가려움의 배후가 점점 궁금해진다
내 등은 나이 먹을수록 아프리카가 되어간다 팔이 짧아 처음부터 손이 닿지 않는 대륙 긁어도 긁어도 가려움의 배후를 알 수 없다
다만 나도 모르는 사이에 태양은 떠서 한 차례 가려움을 대륙에 뿌리고 어디론가 사라진다
*갈대는 배후가 없다-임영조 시인의 시 제목.
박남희 시인 / 환유 악기점
새를 말하려 하는 것이 아니다 시냇물을 말하려는 것도 아니다
새가 날아간 자리 시냇물이 흘러간 자리에 핀 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꽃이 시들어 떨어진 자리에 기어가는 개미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개미의 행렬을 따라가다가 만나는 노을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새가 날아가고 꽃이 진자리에도 끝끝내 남아 소리의 행방을 찾고 있는 그늘을 말하려는 것이다 조금 더 솔직히 말하면 그 그늘의 주인을 말하려는 것이다
이곳의 악기점엔 주인이 따로 없다 주인이 악기이고 악기점이다 온 몸에 소리를 숨기고 울음을 참아온 구름에게도 동무가 있다면 그 동무도 악기점이다
푸름을 떠받치는 것이 그늘이다 그늘이 자라야 푸름이 무성해진다 악기를 켜는 일은 그늘 속의 소리를 찾는 일이다 그늘 속에서 오랫동안 잊고 산 어머니의 울음소리를 찾는 일이다
푸르다는 것은 그늘의 울음을 잊지 않는 것이다 그늘 속의 환유를 찾아 그 울음을 키우는 일이다 그리하여 울음 속으로 끝없이 미끄러지는 일이다
박남희 시인 / 외로움의 전략
이제 모처럼 외로워볼까 근원을 잃어버린 강물처럼 최초의 물방울 소리도 잊어버리고 어디론가 혼자 흘러가볼까 그동안 내가 만났던 외로움은 외로움이 아니야 먼 우주를 바라봐 망망한 우주를 혼자 떠도는 무수한 별들을 좀 봐 북두칠성이나 오리온자리처럼 별자리를 이루고 있는 별들도 서로 수십 광년씩 떨어져 있어서 여전히 외로운거야
외로움이 별자리를 만드는 거야 외로움은 쉽게 해소해버리는 것이 아니야 외로움으로 반짝이는 별자리가 아름다운거야 강물도 별들도 저만의 외로움이 있어 유구한 거야 외로움이 오롯한 존재를 만드는 거야 풀잎 위에 맺혀있는 이슬방울도 외로워서 아름다운 거야
외로움에도 전략이 필요해 북두칠성처럼 서로에게 자유를 주고 스스로의 내면을 향하여 무섭게 반짝이는 전략, 강물처럼 어디론가 끝없이 흘러가는 것도 전략이야 머물러 스며들지 않게 속도에 몸을 맡기고 출렁출렁 흘러가다 바다에 이르러 외로움의 방향을 아주 놓아버리는 전략, 바다가 깊은 건 외로움에 방향이 없기 때문이야 망망한 눈빛으로 바라보아도 알 수 없는 외로움의 방향 대신 스스로 깊어지는 법을 터득했기 때문이야
이제 나도 모처럼 외로워볼까,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백석의 시 「흰 바람벽이 있어」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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