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언 시인 / 페이크 삭스
할머니의 방에서 뜨개질을 했어요 이따금 이모가 놀러와 잃어버린 이야기에 그물코를 넣어요
예전엔 그랬었지 버선목 세우며 바람을 막았었지
검정 실이 풀려나갈 때마다 까만 스웨터의 몸은 완성되어 가고 우리의 감각은 별처럼 빛나고
추운 줄 모르는 아이들처럼 숨바꼭질 놀이에 해 지는 줄 모르고
얘야, 감기 들라 대문 밖을 떠도는 할머니의 목소리 장롱에 숨어서 잠들었을 뿐 속이려 했던 게 아니었어요 이제 그만 뜨개질을 멈추세요 할머니
-시인정신. 2019년 겨울호
이주언 시인 / 딱따구리 사랑법
두드린다 나뭇가지 두드린다 더 높은 나뭇가지 당신 안에 있나요? 어디 있나요? 어여쁜 벌레의 형상으로
두드리면 들릴 것이다 두드리면 대답할 것이다 먹힐 것이다 터져 나올 것이다 곪아있는 우리의 삶이 터져주기를 그러나 잠시 두드리다 마는
우리는 볼록한 새가슴 누구나 사랑할 수 있지만 누구도 사랑할 수 없는 혼자서 톡.톡. 제 내부만 쪼는 뜨거운 부리를 가졌지
허공에 번지는 배고픈 사랑의 동심원 속에 웅크린 먹잇감의 마음을 모르는 당신
포기하지 말아요 한 포기 두 포기 햇빛은 당신 숨을 죽이려 하지만 오히려 안전한 겨울, 눈이 내려요 폭설 폭언 폭포처럼 쏟아지는 깊은 소리의 말들이 폭.폭. 빠지는 오후는 컴컴한 그대의 하늘이 폭약처럼 터지는 오후는 안전하답니다, 그러니까 흐린 날은 정말 안전할까요? 묻는 당신, 믿음을 집요하게 구하지 말아요
두드리면 열릴 것인가 의심하는 새들과 책갈피에 끼인 채 결국 열리지 않는 새들은 모두 같은 형식의 답안을 허공에 새긴다, 라고 써 봅니다
<신생> 2011, 봄호
이주언 시인 / 소년의 아프리카
어둠이 자라는 동안 소년이 나고 자라서 바오밥나무에 초록마당 들여놓았지 동그란 초록마당 둥지로 태양은 매일 찾아와 잠들고
어둠이 쌓이는 동안 킬리만자로의 설원 녹아내리고 지상의 땅을 고집하는 어른들은 염소의 내장을 목에 두른 얼굴로 저것 보라구! 지구를 떠도는 모래폭풍을 보라구! 창을 든 채 외쳐대고
모가지를 한껏 꺾어 밤하늘 올려다보았지 별을 튕겨 땅따먹기 시작해볼까
케냐의 목초지가 사라지는 동안 소년의 팔다리 가늘어지고 아버지는 탄환을 장 전하고서 염소를 지키자 우리들의 염소를!
별이 돋으면 염소 떼 무더기로 쏟아져나와 밤하늘의 평원을 돌며 풀을 뜯는데 밤새 반짝이는데
촘촘한 그물 없어도 꿈은 놓치지 말아요 공중의 국경 쓱쓱 지우며 소년은 초록마당 가득 씨앗을 뿌리겠지 밤새 어둠의 기억 하나씩 추방하고 있겠지
『시선』2011년 봄호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영춘 시인 / 성城밖에서 (0) | 2021.10.26 |
---|---|
금란 시인 / 장미 레시피 외 1편 (0) | 2021.10.26 |
오정국 시인 / 붉은 사막 로케이션외 1편 (0) | 2021.10.25 |
조세핀 시인 / 샤스 스플린* (0) | 2021.10.25 |
김해빈 시인 / 원은 시작과 끝이다 외 1편 (0) | 2021.10.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