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금란 시인 / 장미 레시피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10. 26.

금란 시인 / 장미 레시피

 

 

이파리를 한 잎 한 잎 떠서 프라이팬에 사뿐히 올려놓으세요

잎과 잎이 엉키면 안 돼요

큰 잎은 뜨거운 곳에

작고 연한 잎은 미지근한 곳에 따로따로 펼쳐 놓으세요

 

중얼거리던 시간이 포개어져 잎이 되었나

순하디순한 물방울이 꽃잎에서 흘러나온다

 

여덟 번의 뜨거움과

여덟 번의 차가움이

왼손과 오른손의 감각을 무뎌지게 할 거예요

 

향기는 공기와 벽에 부딪히고

돌고 돌아

살 속으로 은밀하게 파고든다

 

수천의 이파리가 찻잎이 되는 동안

나쁜 일도 좋은 일도 일어나지 않아

 

손톰을 물어뜯는다

핸드폰에 묻은 지문을 따라가다

창밖으로 쏟아지는 소나기를 바라본다

여기저기 나뒹구는 낙엽처럼 내 얼굴이 아득해진다

 

붉어지나요

검어지나요

 

뜨거워지면 어떤 종은 사라지기도 하지만

어떤 종은 바짝 말라 향기를 뿌리고 그 자리를 서성인다

 

스멀스멀 피어나는 장미

꽃이 되지 못한 채

까맣게 타오르다 짐승이 되어 버린 장미

 

장미에서 장미가 사라지면

오늘의 레시피는 성공이에요

 

금란 시집 <얼굴들이 도착한다>에서

 

 


 

 

금란 시인 / 창신동

 

 

골목은 언제나 비가와도 바짝 말라 있다

사람의 발자국이 어쩌다 골목에 박히지만

비가 내리는 날이면 여지없이 사라지고 만다

완제품을 실어 나르는 오토바이 바퀴자국이 무수히 남겨진

가파른 골목에 미싱 소리로 요란하다

서울에서 이태리까지 열 번을 왕복으로 오갈 수 있는

실타래비가 내린다

남산타워가 지척이고

광화문의 촛불이 손끝에서 뜨겁게 달아올라도

토요일 하늘을 등진 여자의 발바닥에 달린 미싱 페달 위로

바늘비가 내린다

슈퍼에서 사온 과자봉지가 들썩거리고

낙산 공원의 가로등 불빛이 자정을 재촉하는

슬리퍼비가 내린다

염색 오천 원, 퍼머 이만오천 원이 무색한 텅 빈 미장원

형형색색의 매니큐어를 칠하고 있는 원장의 앞치마에

머리카락비가 내린다

공장 문짝에 너덜너덜 붙어 있는

방 두 칸에 보증금 이천만원, 월 오십오만 원 전단지

구찌, 와끼, 마도메, 시야게 간판 속으로 파고드는

뽕짝비가 내린다

미싱 바늘구멍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페달을 밟을 수 있는

창신동 골목길에

늙은 여자의 주름비가 내린다

 

—《현대시학》2017년 4월호

 

 


 

금란 시인

1965년 전북 순창에서 출생. 2013년 《시로 여는세상》으로 등단. 시집으로『얼굴들이 도착한다』(2019 파란)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