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춘 시인 / 골목 ㅡ오토바이가 지나가면 바람은 맛이 달라진다
1 그녀가 기억하는 골목은 주술에 걸리곤 했다. 엄마는 사라졌는데, 엄마가 아끼던 머리핀은 땅바닥에 그대로 있었다. 그늘은 지붕 사이로 천천히 흘러와 고였다. 아버지가 사라진 후, 골목에는 오랫동안 그늘이 사라지지 않았다. 오토바이가 지나가면 바람은 맛이 달라진다. 두고 온 것이 많다. 고아의 몫은 골목 밖으로 튕겨져 나온 한 조각의 그늘. 가방 속에 숨긴 그늘을 사람들에게 종종 들키곤 했다.
2 한 때 가족의 일원이었던 그 시절을 빼고는 다 환한 그가 비를 맞는다. 빗소리가 흘러드는 열린 골목에서 비린내가 몰려나온다. 검은 장화를 모자처럼 쓴 담벼락은 비린내를 얼룩으로 가졌다. 그가 골목에서 나오자 골목이 닫힌다. 닫힌 골목의 멍든 어깨에 빗물이 번진다. 오토바이가 지나가면 바람은 맛이 달라진다. 그의 두 발이 자꾸 허공으로 떠오르는 이유, 그의 혈통은 구름.
3 그가 빨간 헬멧을 쓴 그녀를 배달하기 시작했다. 바람의 맛은 분분했다. 구름을 가득 채운 그녀의 가방에서는 더 이상 그늘이 덜거덕 거리지 않았다. 가방이 빵빵해졌다. 주인집 노파가 그녀의 빵빵한 가방에 관심을 보이며 반지하 셋방의 열쇠를 건넨다. 문을 열자 환부 위에 붙인 파스처럼 방바닥에 붙어있는 한 뼘의 볕.
격월간 『시사사』 2014년 5~6월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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