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정호 시인 / 벚꽃 밀행
어서 내려와 하루가 다 기울잖아 분홍 코트의 그녀가 소리 치고 있었다 듣는 둥 마는 둥 침대로 돌아와 잠을 잤다 꿈속에서도 꽃잎 틔우는 소리 어서 내려오라고 뒤에서 손 흔드는 저녁이 곧 올 거라고 연두와 분홍 잎 열차를 타고 사람들이 몰려가는 소리 얼마쯤 지났을까 창을 내다보니 코트를 걸쳐놓고 어디로 갔을까 시든 그녀의 젖무덤이 떨어져 있었다 아무도 없는 길가엔 구름이 내려와 서성이고 도마뱀 한 마리 꽃샘바람처럼 지나갔다
석정호 시인 / 달빛 엘리베이터를 타다
돌아오는 길의, 그 안에는 아무도 없다 입을 벌려 철사 뭉치 하나를 뱉어낸다 썩지 않는 말 몇 조각과 조롱의 붉은 입술 풀리지 않는 일 타래들이 걸려있다 피 묻어나온 내 속이다
입을 또 벌려 점액질의 연체동물 한 마리를 뱉어낸다 미끈거리는 저 얼굴로 나는 사람들 사이를 굽실대며 건너왔다
오, 나를 품은 캡슐 거울을 깨뜨리며 속을 비운 내가 한번 붉게 웃으면 다시 태어나는 만월滿月처럼,
세상의 창을 닫아걸고 엘리베이터 둥싯 올라간다
달빛 가지에 걸린 내 집이 문을 열었다
석정호 시인 / 명자꽃
지난해의 뻐꾸기 울지 않는다 풀밭엔 보라색 자전거들이 버려져 있다 어디선가 손 바깥의 꽃잎 지는 소리, 또 꽃잎 이는 소리 곧 한 번 연락드릴게요 고개 숙인 울타리 아래 약속이 걸려 있다 풀밭을 떠난 운동화는 어디에서 패랭이 구름을 만나고 있을까 징검다리 건널 때 허방을 짚기는 향다반사, 잡은 손 놓치는 것도 언제나 감내해야 할 일 곧 한 번 연락드릴게요 약속이 붉게 타고 있다
석정호 시인 / 딱정벌레
지난 황혼 강도를 만났을 때, 피에 붙어 떨어지지 않던 보따리였다 딸 여섯과 한 아들을 세상에 내놓기 위해, 많은 세월 펄펄 끓는 물에 뒤엉키는 국수 면발이었다 고춧가루 얼굴로 몇 번씩 뜨거워지는 감자탕 뼈다귀였다 여든 세 살 나의 장모, 홀로 사는
들판에서 돌아온 내 외로움이 앉은걸음으로 기어가서 온몸 말아 넣고 슬며시 그 안에서 잠들고도 싶은 힘없으나 때로 단단한 손,
밤마다 일곱 대문의 초인종 위에 몰래 올라붙은 딱정벌레!
석정호 시인 / 따뜻해 지는 법
아침 일곱 시의 전철 안은 얼음이다 공처럼 오므라들어 팔장 끼고 앉았으면 도톰한 어느 토끼 하나 옆자리를 파고든다
덜컹대며 몰아가는 전차戰車 길에서 한 줄기 봄바람이라도 맞듯, 어라 아까부터 옆 팔뚝이 따스하다 토끼는 책을 읽는 듯 무시모한데 그의 체온이 나를 녹이고 있는 것이다 나의 공은 차츰 부풀어 오른다 알게 모르게 누가 마련해준 받침대를 딛고 오늘가지 왔구나
어느 새, 내 몸은 데워졌다 받침대는 발딱 일어서 나가고 낯선 얼음이 하나 내 옆으로 덜컹 굴러온다 이제는 내가 녹여줄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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