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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오정국 시인 / 붉은 사막 로케이션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10. 25.

오정국 시인 / 붉은 사막 로케이션

 

 

어디서 시작됐는지 종잡을 수 없다

붉은 사막 로케이션

단어들의 윤곽이 선명하다

평면의 그림에서 입체적 형상이 일어서듯

선인장처럼 타오르는 빛의 하늘

모로코 남쪽 붉은 사막 로케이션

거기서 눈먼 자는 되돌아올 수 없다

제 눈을 찌른 오이디푸스가

철가면을 흔들며 울부짖는 곳 ⃰

그 어디쯤 모래무덤에

내 전생(前生)의 발자국을 맡겨둔 것 같다

 

검은 가죽바지 오토바이가

일몰의 지평선을 넘어가고

밤의 야영지는 끝없다

양고기 굽는 모닥불의 그림자들

빛으로 어둠으로 얼룩진

얼굴들, 구릉 너머 모래밭에 잠겨있는데

발을 들이밀 자리가 없다

텔레비전 화면의 긴급뉴스 자막처럼

내 머릿속을 지나가는

모로코 남쪽 붉은 사막 로케이션

이 문장이 거쳐 온 경로를 밝힐 수 없다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 감독의 영화 「오이디푸스 왕」

 

시집 『재의 얼굴로 지나가다』(민음사, 2021) 중에서

 

 


 

 

오정국 시인 / 어디선가 네가 이 순간을

 

 

어디선가 네가 이 순간을 본다면, 이토록 아름다운 춤은 없었다고 말할 거야 내 몸 어디에서 이런 춤이 나온 건지 알 수 없어

 

이 얼굴로 내가 시작되는 게 아니고

이 발걸음으로 내가 멈춰서는 게 아니라는 것이지

 

이 춤은 차갑고 무서워

북극 빙하에서 꺼내온 눈보라 같고

새의 심장에서 건져온 날개 같아

네가 그 까닭을 말해주길 바라는데

 

어둑한 숲에서 자작나무 흰 빛이 새어나오고, 강바닥의 물살이 자꾸만 교각에 되감겨 오네 너는 멀리서 아득하게 살아 있어서

 

내 몸이 껴입는 풍경들

월요일의 장미가 꽃피고

수요일의 가로수가 밀려오고

금요일의 묘지가 불타고 있어

 

언제 어디서든 단 한 번의 춤이야, 그러니까 장미의 입술을 너에게 보내고, 구름과 바람과 태양의 날씨를 여기에 담는 거야, 택배 잘 받아

 

시집 『재의 얼굴로 지나가다』(민음사, 2021) 중에서

 

 


 

오정국(吳廷國) 시인

1988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저서로는 시집 『저녁이면 블랙홀 속으로』, 『모래무덤』,『내가 밀어낸 물결』,『멀리서 오는 것들』,『파묻힌 얼굴』,『눈먼 자의 동쪽』, 『재의 얼굴로 지나가다』와 시론집『현대시 창작시론-보들레르에서 네루다까지』, 『야생의 시학』 등 출간.  제12회 지훈문학상, 제7회 이형기문학상, 경북예술상 특별상 수상. 현재  한서대 미디어문예창작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