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정국 시인 / 붉은 사막 로케이션
어디서 시작됐는지 종잡을 수 없다 붉은 사막 로케이션 단어들의 윤곽이 선명하다 평면의 그림에서 입체적 형상이 일어서듯 선인장처럼 타오르는 빛의 하늘 모로코 남쪽 붉은 사막 로케이션 거기서 눈먼 자는 되돌아올 수 없다 제 눈을 찌른 오이디푸스가 철가면을 흔들며 울부짖는 곳 ⃰ 그 어디쯤 모래무덤에 내 전생(前生)의 발자국을 맡겨둔 것 같다
검은 가죽바지 오토바이가 일몰의 지평선을 넘어가고 밤의 야영지는 끝없다 양고기 굽는 모닥불의 그림자들 빛으로 어둠으로 얼룩진 얼굴들, 구릉 너머 모래밭에 잠겨있는데 발을 들이밀 자리가 없다 텔레비전 화면의 긴급뉴스 자막처럼 내 머릿속을 지나가는 모로코 남쪽 붉은 사막 로케이션 이 문장이 거쳐 온 경로를 밝힐 수 없다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 감독의 영화 「오이디푸스 왕」
시집 『재의 얼굴로 지나가다』(민음사, 2021) 중에서
오정국 시인 / 어디선가 네가 이 순간을
어디선가 네가 이 순간을 본다면, 이토록 아름다운 춤은 없었다고 말할 거야 내 몸 어디에서 이런 춤이 나온 건지 알 수 없어
이 얼굴로 내가 시작되는 게 아니고 이 발걸음으로 내가 멈춰서는 게 아니라는 것이지
이 춤은 차갑고 무서워 북극 빙하에서 꺼내온 눈보라 같고 새의 심장에서 건져온 날개 같아 네가 그 까닭을 말해주길 바라는데
어둑한 숲에서 자작나무 흰 빛이 새어나오고, 강바닥의 물살이 자꾸만 교각에 되감겨 오네 너는 멀리서 아득하게 살아 있어서
내 몸이 껴입는 풍경들 월요일의 장미가 꽃피고 수요일의 가로수가 밀려오고 금요일의 묘지가 불타고 있어
언제 어디서든 단 한 번의 춤이야, 그러니까 장미의 입술을 너에게 보내고, 구름과 바람과 태양의 날씨를 여기에 담는 거야, 택배 잘 받아
시집 『재의 얼굴로 지나가다』(민음사, 2021)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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