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형준 시인 / 달빛이 참 좋은 여름밤에
들일을 하고 식구들 저녁밥을 해주느라 어머니의 여름밤은 늘 땀에 젖어 있었다 한밤중 나를 깨워 어린 내 손을 몰래 붙잡고 등목을 청하던 어머니, 물을 한바가지 끼얹을 때마다 개미들이 금방이라도 부화할 것 같은 까맣게 탄 등에 달빛이 흩어지고 있었다 우물가에서 펌프질을 하며 어머니의 등에 기어다니는 반짝이는 개미들을 한마리씩 한마리씩 물로 씻어내던 한여름 밤 식구들에게 한번도 약한 모습 보이지 않던 어머니는 달빛이 참 좋구나 막내 손이 약손이구나 하며 시원하게, 수줍게 웃음을 터뜨리셨다
박형준 시인 / 해변 시인학교
여름밤이었다. 우리는 해변의 모래를 파고 그 속에 초를 심었다.
초 주변에 모래를 둥그렇게 쌓아놓고 촛불을 켰다. 바람이 불지 않는데도 우리는 또 손바닥을 둥그렇게 펼쳐놓고 모래 구덩이 안에서 타는 촛불을 감쌌다.
해수욕을 하던 사람들이 바닷물에서 나와 우리 주위를 지나갈 때마다 촛불이네 하고 한마디씩 하고 갔다.
우리 중에 한 사람이 바다가 왜 이리 잔잔할까, 바람이 하나도 불지않으니 촛불을 감싼 손바닥이 민망하네 하고 웃었다.
바닷물이 잔잔하니 파도가 비단 같았다. 파도가 우리들 발목에 비단띠를 두른 것처럼 해변으로 밀려들고 있었다.
촛불인 줄 알면서도 촛불이네 하고 지나가는 사람들과 비단 띠처럼 어둠을 두르고 있는 밤바다와 모래 구덩이 속에서도 자신의 할 일은 그 작은 공간을 밝히는데 있다는 듯 타고 있는 촛불.
다른 한 사람이 말했다. 우리가 저 작은 구덩이 속에서 타는 촛불만한 존재라도 될까. 또 다른 한 사람은 저 작은 구덩이 안에 촛불처럼 몸을 누이고 한 생을 녹아내리고 싶다고 했다.
나는 너무나 조용한 바다가 호수 같았다. 밤바다에서 식물을 보고 싶었다. 백 년이나 한 천년 정도쯤에 한번 꽃과 열매를 맺는다는 식물이 자라는 바다.
사람들과 물건들이 저마다 다른 자리에서 반짝이고 있는 바다의 상점에 촛불이 하나 켜져 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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