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봉덕 시인 / 뒷면의 도마
귀로하는 것들의 뒤는 의심스러웠다 날카로운 입을 닫고 정면으로 마주한 적 없이 묵음으로 사라지는 노래가 그러했다
존재한다는 것은 보여 주는 것, 보여 주지 않으며 살아 있다고 말하고 싶은 것의 뒷면에 불시착한 인종들
처음부터 뒷면의 정면을 설파했다 출발부터 틀렸다고 말하곤 했다
뚜껑이 없는 잠이 필요했다 쓸모없는 아침 시끄럽지 않다는 것은 선택이 필요하지 않았다는 말
의심스럽지 않았다고 입들은 말했지만 무서운 윗면을 더듬는 중이라고 객석은 읽었다 같은 장면만 재생되는 영화는 흥미를 잃어 갔다
털북숭이 손을 아래로 밀어 넣었다 만져지지 않는 뒷면은 가끔 수면 밖으로 나왔다
식사를 뒤집었지만 뒤집혀지지 않는 도마의 뒷면 입맛을 부추기지 않는 식욕이 튀어나왔다
강봉덕 시인 / 사각 수박
사각 속에 사각 줄기는 달려가다 정지 정지 팔다리는 버려야지
둥근 몸은 바꿔야 해 유리병에 더 두꺼운 유리벽 내 귀를 세워 귀들은 브레이크 브레이크
불안은 불안으로 치료되지 사각 밖에 사각 더 큰 사각이 필요하지
방이 필요 없지 머리가 필요 없지 맛이 없어도 괜찮아 길들여진 맛 똑같아야 되는 맛
세상은 정지 정지 악몽은 브레이크 브레이크
속도는 평면으로 시간은 모서리로
강봉덕 시인 / 그 여자, 마네킹
때론, 페션도 종교가 된다 묵언 수행하는 그 여자 침묵으로 한 종파를 완성시킨다 그 종파의 교리는 계절을 앞질러 가는 것 한 계절 똑같은 웃음이나 빛깔 표정을 만드는 것이다 새로운 계절에 이르기 전 그 여자의 설법은 고요하고 은밀하다 이 거리에 들어온 사람들은 주술에 걸린듯 그 여자의 짝퉁이 되기 시작한다 포교는 중심에서 변방으로 퍼진다 짧은 치마처럼 간단명료한 표정 미끈한 팔다리로 사람들을 전염시키며 파격적인 노출도 교리가 된다 페션이 변할 때마다 사람들은 새로운 표정을 만들며 순종적으로 바뀐다 경기 불황이 몰려오면 그녀는 더 화려하고 빠르게 변신한다 사라진 추종자를 다시 불러들인다는 것은 침침한 눈으로 바늘귀에 실 꿰듯 힘겨운 일이지만 손바닥 뒤집듯 가벼울 수 있다는 듯 투명한 벽 앞으로 모여드는 사람들 그 여자, 화려한 변신을 시작한다
강봉덕 시인 / 감은사
팽팽한 허공이 균형을 잡는다 늘 마주 보고 서 있는 그들은 맞수다 쉽사리 다가서지도 물러나지도 않는다 중심이 흔들리지 않는 저 근성 쓰러지지 않는 비결은 마주 보고 있기 때문 서로 무너지지 않으려 안간힘 쓴다 대웅전 앞, 사각의 뜰 먼지나 흙이 되어 모두 돌아간 시간 아직 버티고 있는 저 힘 눈동자는 당신의 허점을 살핀다 쓰러지는 일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다시 일어서지 못하는 일이 무서운 것 가까이 있다 멀리가면 맞수가 아니다 일상의 기울기가 그림자를 만드는 시간 이유도 모른 채 중심에서 떠나간 사람들 죽죽 금 간 모습으로 감은사 탑 주위를 돈다
강봉덕 시인 / 새들의 정치학
까만 새가 하늘을 덮는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달려 든다 맞바람 맞아도 흔들리지 않고 정확하게 앉을자릴 찾는다 눈치 보지 않고 아무 곳이나 배설하는 몰염치에 욕을 해도 하늘을 까맣게 수놓는다 참으로 뻔뻔한 놈이다 천적을 피하려 무리지어 다닌다 잠들기 전까지 날개를 움직인다 숨거나 이탈하면 표적이 된다 둥지를 만들지 않는다 앉는 곳이 집이 되는 철새 평생 둥지 틀 곳을 찾아 떠돌아다니기만 했을 철새 날개가 꺽어지는 줄도 모르고 허공을 날아다닌다 힘센 철새들에게 밀려 무리를 버리고 홀로 날아다닐, 계절의 변화에 민감하다 철 지난 계절처럼 잊혀진다 무리를 떠난 새가 새로운 무리를 찾아가는 비행 고난하고 비겁하고 비굴하거나 용맹하지 않고 힘없는 새는 살아남기 위해 철새가 되기도 한다 세상이 어두워져 거대한 어둠이 몰려들면 까만 새들이 단단한 날개를 접고 대숲으로 숨는다.
강봉덕 시인 / 화분 사이의 식사
1. 세발선인장과 인도고무나무가 우리 집 거실로 이사 온날 허공이 위태하더니 떠들썩한 식탁을 차린다. 악어 울음, 낙타 발자국, 잘 구워진 모래, 붉은꼬리열대사다새의 웃음, 전갈의 맹독을 한데 모아 지지고 볶고 비비는 특별 메뉴 섞일 수 없는 것을 잘 섞는 것이 이 요리의 비법, 가끔 개성 강한 것들이 부딪혀 스콜을 퍼붓기도 하고 회오리바람이 몰려오지만 이때 맛볼 수 있는 것이 이곳의 별미이다 지구본을 돌리듯 화분과 화분 사이를 돌리면 철철 넘치는웃음이나 울음, 때로는 비명까지 모두 제 몸에 갇힌 소리 하나씩 홀린다 신기루 같은 입들이 둘러 앉아 먹는 늦은 저녁 엇나간 일기에보처럼 싱싱한 맛이다
2. 때 늦은 우리 집 저녁 식탁 뿌리처럼 바싹 마른 입들이 허공에 길을 낸다 "막내는 영어학원가서 아직 안 온 거야, 아마 길 건너 게임방에 있을 거야, 이번 학기 휴학하고 주유소 아르바이트 할 거예요. 등록금 걱정은 하지 마세요, 내 삶도 충전 좀 할거고요, 아버지 어머니 갈라서실 거 같아요, 각 방 쓴 지도 오래고요, 어제 박과장이 해고됐어, 당분 간 집에 늦게 올거야, 대출금 이자 날짜는 왜 이리 빨리 다가오지. 이번 달은 보혐해약해서 이자라도 넣어야겠어요, 이번 추석에 막내 삼촌 경훈 이야기 좀 해요, 언제까지 같이 살아요, 집도 좁은데..." 양푼에 어울리지 않은 말들을 집어넣고 섞일 때까지 돌리는 저녁 서로가 서로에게 조금씩 섞이기도 하고 허물어지기도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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