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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형준 시인 / 달빛이 참 좋은 여름밤에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10. 26.

박형준 시인 / 달빛이 참 좋은 여름밤에

 

 

들일을 하고 식구들 저녁밥을 해주느라

어머니의 여름밤은 늘 땀에 젖어 있었다

한밤중 나를 깨워

어린 내 손을 몰래 붙잡고

등목을 청하던 어머니,

물을 한바가지 끼얹을 때마다

개미들이 금방이라도 부화할 것 같은

까맣게 탄 등에

달빛이 흩어지고 있었다

우물가에서 펌프질을 하며

어머니의 등에 기어다니는

반짝이는 개미들을

한마리씩 한마리씩 물로 씻어내던 한여름 밤

식구들에게 한번도 약한 모습 보이지 않던

어머니는 달빛이 참 좋구나

막내 손이 약손이구나 하며

시원하게, 수줍게 웃음을 터뜨리셨다

 

 


 

 

박형준 시인 / 해변 시인학교

 

 

  여름밤이었다. 우리는 해변의 모래를 파고 그 속에 초를 심었다.

 

  초 주변에 모래를 둥그렇게 쌓아놓고 촛불을 켰다. 바람이 불지 않는데도 우리는 또 손바닥을 둥그렇게 펼쳐놓고 모래 구덩이 안에서 타는 촛불을 감쌌다.

 

  해수욕을 하던 사람들이 바닷물에서 나와 우리 주위를 지나갈 때마다 촛불이네 하고 한마디씩 하고 갔다.

 

  우리 중에 한 사람이 바다가 왜 이리 잔잔할까, 바람이 하나도 불지않으니 촛불을 감싼 손바닥이 민망하네 하고 웃었다.

 

  바닷물이 잔잔하니 파도가 비단 같았다. 파도가 우리들 발목에 비단띠를 두른 것처럼 해변으로 밀려들고 있었다.

 

  촛불인 줄 알면서도 촛불이네 하고 지나가는 사람들과 비단 띠처럼 어둠을 두르고 있는 밤바다와 모래 구덩이 속에서도 자신의 할 일은 그 작은 공간을 밝히는데 있다는 듯 타고 있는 촛불.

 

  다른 한 사람이 말했다. 우리가 저 작은 구덩이 속에서 타는 촛불만한 존재라도 될까. 또 다른 한 사람은 저 작은 구덩이 안에 촛불처럼 몸을 누이고 한 생을 녹아내리고 싶다고 했다.

 

  나는 너무나 조용한 바다가 호수 같았다. 밤바다에서 식물을 보고 싶었다. 백 년이나 한 천년 정도쯤에 한번 꽃과 열매를 맺는다는 식물이 자라는 바다.

 

  사람들과 물건들이 저마다 다른 자리에서 반짝이고 있는 바다의 상점에 촛불이 하나 켜져 있는 것 같았다

 

 


 

박형준(朴瑩浚) 시인

1966년 전북 정읍에서 출생.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졸업. 명지대 문예창작과 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199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家具의 힘〉이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나는 이제 소멸에 대해서 이야기하련다』(문학과지성사, 1994),『빵냄새를 풍기는 거울』(창비, 1997),『물속까지 잎사귀가 피어 있다』(창비, 2002), 『춤』(창비, 2005) 등과 산문집『저녁의 무늬』,『아름다움에 허기지다』가 있음. 제15회 동서문학상과 2009년 소월시문학상 대상 수상. 제2회 시인광장문학상 수상. 현재 〈시힘〉 동인. 동국대학교 문예창작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