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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고경자 시인 / 사과, 떨어지다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10. 26.

고경자 시인 / 사과, 떨어지다

 

 

모든 상황은 이렇게 이해되고 있었어

붉은 전쟁의 시작과 변곡점

어쩌면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은 현실세계에서

발견되는 사과,

그 사과 하나가 떨어졌어

냉큼 줍기에는 체면이 망가질까봐 망설였어

 

그때 우연히 한 여자가 다가와

쓱 손을 내밀었어

보기에 탐스럽고 이 세상 맛이 아닐 것 같은

욕망의 빨강이

그녀 곁으로 다가갔어

 

내 것이었던 사과,

내 것이 아닌 적이 없었던 사과가

다른 여자 손에 들어가고,

더 매력적인 빨강

밤하늘의 별들이 다 떨어져 버린

혼란의 밤 속에 불안이 왔어

 

하지만 나는 사과가 없고

이제 다시는 사과를 가질 수 없어

울고 싶지만 눈물마저 그 여자가 가져가 버린

이런 불행한 관계,

첫쨰가 아닌 다음에 태어나는

애들이 가지는 숙명인지도 모르지

세상의 모든 사과가 붉어지고

눈물 꼭지는 꽉 감겨 돌아가지 않았어

스스로 중력을 잃어버린 오십의 나이에는

사과가 가슴에서 뚝 떨어졌어

 

 


 

 

고경자 시인 / 삼학도, 슬픈 그림자

 

 

바위에 숨구멍이 생겨나면서 노래가 들려왔다

파도를 잔잔하게 하고

어머니를 따라 뭍으로 올라온 노래는

비바람에 무너지는 슬픔 같았고

얼굴을 가로지르는 주름 같았다

어머니의 눈가에는

바다의 깊은 물살이 출렁거렸다

 

배를 따라나선 어부들이 돌아올 시간,

붉은 태양이 여백을 채우고

시린 바람의 옆구리를 어루만지면

어부들의 사연이 쏟아져 나와

굽어진 골목길를 휩쓸었다

 

좌판 시장에 올라온 투명한 비늘에서

바다의 본능이 얼핏 보였다

비늘에 찔린 수많은 그림자들로

바다는 길을 내주고서야 눈 감는 법을 배운다

 

어머니의 오래된 염원 같은 노래가

멈추지 않고 들리는 삼학도,

슬픈 그림자가 밤이면 다녀가곤 했다.

 

시집 『사랑의 또 다른 이름』

 

 


 

고경자 시인

광주 출생. 광주대학교 문예창작과 대학원 졸업. 2011년 《시와사람》 겨울호로 등단. 2015년, 2018년, 2020년 광주문화재단 문예창작기금 선정. 시집으로 『하이에나의 식사법』, 『고독한 뒷걸음』이 있음. 소방관으로 근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