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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상미 시인 / 자작나무 타는 소년

by 파스칼바이런 2021. 10. 27.

김상미 시인 / 자작나무 타는 소년

- L 시인에게

 

 

  L 시인은 웃기고 이상한 에고ego로 한없이 불편하고 냉소적인 이 시대에 아직도 내게 구식으로 안부를 묻는 시인이다. 그는 나를 누님이라고 부른다. 아무 말 없이 자신이 좋아하는 노래와 그림을 카톡으로 보내고 자신의 시를 찍어 보내기도 한다. 어떤 날은 등산길에서 발견한 네잎클로버를 내 가슴에 심어 주기도 하고, 야생오리들이 꽥꽥 서로를 핥아주는 홍제천에서 이 나라의 음흉하고 야비한 정치판에 화(火)가 나 진저리칠 때도 그는 달달한, 슬픔을 단번에 기쁨으로 바꿔줄 기세로 누님, 제발 아프지 마세요! 몇 번이나 단비처럼 내 창을 부드럽게 적신다. 그는 집안의 가장이면서 주부다. 이불 빨래를 하고, 김치를 담그고, 반찬을 만들고, 국을 끓인다. 그 음식 냄새가 홍제동까지 밀려와 깜빡했던 배고픔에 나도 모르게 수저를 들고 밥을 챙겨 먹는다. 그러곤 그의 시집을 펼쳐 접어놓은 시들을 다시 읽는다. 그러면 저 먼 곳으로부터 한 소년이 다가온다. 여름이나 겨울이나 혼자 노는 어떤 소년*, 자작나무를 타고 높이 높이 올라갔다가 다시 땅 위로 내려와 시를 쓰고, 그 시를 햇빛에 말리려고 진심을 다해 자작나무를 휘어잡는 통 큰 바람 소리를 온몸 온 마음으로 지켜내는 한 소년. 내 어릴 적 그리운 구식 시인의 초상!

 

웹진 『시인광장』 2021년 7월호 발표

 

 


 

김상미 시인

부산에서 출생. 1990년 《작가세계》 여름호로 등단. 저서로는 시집으로  『모자는 인간을 만든다』,『검은, 소나기떼』, 『잡히지 않는 나비』, 『우린 아무 관계도 아니에요』, 산문집 『아버지, 당신도 어머니가 그립습니까』』와『오늘은 바람이 좋아, 살아야겠다』 등이 있음. 박인환 문학상, 시와표현 작품상, 지리산문학상, 전봉건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