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미 시인 / 자작나무 타는 소년 - L 시인에게
L 시인은 웃기고 이상한 에고ego로 한없이 불편하고 냉소적인 이 시대에 아직도 내게 구식으로 안부를 묻는 시인이다. 그는 나를 누님이라고 부른다. 아무 말 없이 자신이 좋아하는 노래와 그림을 카톡으로 보내고 자신의 시를 찍어 보내기도 한다. 어떤 날은 등산길에서 발견한 네잎클로버를 내 가슴에 심어 주기도 하고, 야생오리들이 꽥꽥 서로를 핥아주는 홍제천에서 이 나라의 음흉하고 야비한 정치판에 화(火)가 나 진저리칠 때도 그는 달달한, 슬픔을 단번에 기쁨으로 바꿔줄 기세로 누님, 제발 아프지 마세요! 몇 번이나 단비처럼 내 창을 부드럽게 적신다. 그는 집안의 가장이면서 주부다. 이불 빨래를 하고, 김치를 담그고, 반찬을 만들고, 국을 끓인다. 그 음식 냄새가 홍제동까지 밀려와 깜빡했던 배고픔에 나도 모르게 수저를 들고 밥을 챙겨 먹는다. 그러곤 그의 시집을 펼쳐 접어놓은 시들을 다시 읽는다. 그러면 저 먼 곳으로부터 한 소년이 다가온다. 여름이나 겨울이나 혼자 노는 어떤 소년*, 자작나무를 타고 높이 높이 올라갔다가 다시 땅 위로 내려와 시를 쓰고, 그 시를 햇빛에 말리려고 진심을 다해 자작나무를 휘어잡는 통 큰 바람 소리를 온몸 온 마음으로 지켜내는 한 소년. 내 어릴 적 그리운 구식 시인의 초상!
웹진 『시인광장』 2021년 7월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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