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혁 시인 / 몽타주 -장면과 장면 사이에 섬이 있었다. 떠돌이 약장수들이 천막을 치고, 조잡한 공연이나 오래된 영화 따위를 보여주었다. 애들은 가, 애들은 가, 외쳤지만 천막 틈새로 상체만 집어넣은 아이들은 허공에 뜬 채 몸을 흔들었다.
떠돌이 약장수가 부리는 차력사들이 프레임을 부순다 초당 스물네 장의 부적을 팔면서
가짜 영지버섯을 주워 먹은 아이는 아버지의 멱살을 잡고 유대인이나 말갈족의 표정을 짓는다
오늘의 상영작은 「산송장」 나도 지나간 날에는 배우를 꿈꾸고 살던 때가 있었단다⁕
수프를 보고 기뻐하는 연기와 태양을 보고 기뻐하는 연기 사이에서
스스로 목젖이 돋아버린 네거티브 필름 한 롤
어째서 사랑조차 내게 오면 일용할 양식이 되고 마는가 아이의 눈동자 속 살아 있는 송장을 찾으러 온 차력사가 분주하다
아버지의 두 눈을 뒤집는다
기혁 시인 / 팬터마임
사람들 사이에 선을 그으며 살아왔다
안쪽에서 볼 때 그것은 세상의 성곽 같았고 바깥쪽에서 보면 마임 배우가 기대고 있는 가상의 유리벽 같았다
한번 그어진 선은 밟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었지만 감정의 안쪽으로 움직이는 동안 죽죽 그어진 생활이 더 많은 불안과 경계를 부추기고 있었다
때때로 새로운 선을 긋고 기존의 선들이 키워 낸 모서리들을 슬프게 바라보았다
모서리만 남은 인격을 참을 수 없어 떠나버린 친구 품에 안고 바라보다 보이지 않는 상처를 입은 연인도 있었다
부모와 형제마저 숨죽여 그들의 안부를 궁리할 무렵
마임 배우가 기대고 있는 저 유리벽이 진짜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모서리의 궤적만이 빛나는 고립을 별빛이라 부를 때 사람들은 행운과 인연의 초상화 대신
자신의 동공에 몇 개의 별빛을 붙여 놓는다
무수한 선들이 퇴적된 밤하늘을 잊어버리고 부끄러운 이의 설렘과 떠나간 이의 순수를 제 것처럼 이야기하다 마침내 마지막 무게 중심을 모조리 타인을 향해 쏟아버리면
유리벽의 낭만은 조각난 흉기가 되어 날을 세운다 말 없는 웃음에도 슬픔이 있어 몸을 떠는가
사랑은 온몸의 근육 하나하나가 저마다의 방식으로 고독해지는 것 생활의 중력을 거슬러 불가능한 미래를 능청스럽게 내디딘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별빛의 눈을 뜨고 다시, 당신의 모서리에 모서리를 맞춘다
기혁 시인 / 술래잡기
바다에 숨어있던 파도가 고독을 알아차렸네 사랑인척 웅크렸던 설렘이 발자국만 남기고 떠나버렸네 파라솔 그늘 아래 술래를 잊은 낮잠이 모래를 터네 꿈속에서 만난 인연도 슬픔인척 기다리다 바람에 흩날리네 멀리멀리 바닷가 건너 소녀의 눈 속으로 티끌처럼 들어갔네 감긴 눈꺼풀 안에서 불러도 대답하지 않았네 실눈을 뜰 때마다 거센 풍랑이 몰아쳤네 아프고 시린 일상 속으로 더듬더듬 손을 뻗었네 술래만 남은 가슴께 물이 차오르고 있었네 아무도 모르게 난파선 같은 한 사람 밀려와 그 손 잡아주었네
-애지, 2021년 봄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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