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손병걸 시인 / 하모니카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10. 27.

손병걸 시인 / 하모니카

 

 

산다는 것이

들숨 날숨 몰아쉬며

숨이 넘어가도록 땀을 쏟는 일이겠지

 

매우 길게 조금 짧게

매우 높게 조금 낮게

빨랐다 느렸다 쉴새없는 저 곡조는

휘몰아치는 바람 탓에

온몸이 부르르 떨리는 소리겠지

 

때론 주체할 수 없는 눈물도

때론 환한 웃음 짓는 것도

숭덩숭덩 뚫린 몸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겠지

 

그래 파이고 뚫리지 않고서야

어찌 애달픈 곡조가 흘러나오겠어

그래 바람 찾지 않는 계곡에

어찌 아름다운 노래가 있겠어

 

도 하 미 하 솔 하 시 하

도 하 하 하 파 미 레 하

아무렴 살아있으니 멈출 수는 없는 노래지

 

 


 

 

손병걸 시인 / 시소

 

 

봄볕이 쏟아지는 오후

놀이터 한쪽 시소를 향해

아장아장 아이들이 모이고 있다.

 

시소에 탄 아이들

솟구쳐 오를 때마다

별을 따기 시작하는데

아이들을 바라보다가 나는

늘, 불안하게 기우뚱거리는

어른들의 세상을 생각했다.

 

까르르 까르르 놀던 아이들

어느새 제각기 집으로 들어가고

나는 슬며시 걸음을 옮겨

시소 한쪽에 걸터앉았는데

시소는 무리한 꿈을 품고 있지 않았다.

 

자신의 힘을 포기하며

또 하나의 별을 건지는

아름다운 승천을 기다리고 있었다.

 

 


 

 

손병걸 시인 / 겨울 모내기

 

 

젖먹던 힘까지 쏟아부은 듯

힘껏 귓불을 찌르는 모기 한 마리

문득, 비행소리가 불안하다

그래도 어디 한번 해보자는 듯

옳게 꽂히지도 않는 촉수로

금시 또 내 귓불 주위를 앵앵거리는데

오늘도 꼬박 밤샐 것만 같은

어이구, 저 징그러운 철야근무

그래, 넌들 어딜

오체투지로도 어쩌지 못하는

연명(延命)이야 하고 싶겠느냐

쫓기고 쫓겨 다니며

생과 사의 계절을 잃어왔던 건

비단, 너 뿐만은 아니다

산동네 오르는 캄캄한 골목엔

타닥타닥 발걸음 소리 끊이지 않고

허기 채울 숨 한번 들이켜는 것도

잔뜩 휜 허리를 펴고서야 제 맛일진대

이 육중한 엄동설한에 어디

따뜻한 밥상 한번 펴 본 때가 있었더냐

아나,

이 피폐한 몸뚱어리라도 뜯어 먹고

기어이 우리 함께 꽃향기 가득한

저 들판으로 가자꾸나

 

 


 

 

손병걸 시인 / 낙하의 힘

 

 

모든 물질들은 때가 되면 떨어지고

떨어지는 그 힘으로 우리는 일어난다

 

그때도 그랬다, 천수답 소작농으로

시도 때도 없이 떨어지는 쌀독 탓에

수백 미터 갱 속, 아버지의 곡괭이질과

시래기 곶감 담은 대야이고 눈길을 헤치던 어머니의 힘으로

우리 남매는 교복을 입고 푸르른 칠판을 바라보며

김이 오르는 밥상 앞에 앉아왔다

 

어느덧, 딸내미 책가방도 무거워가는데

떨어지고 떨어지는 허기진 살림 탓에

아내는 새벽부터 출근을 서두르고 나는

채 익숙지 않은 흰 지팡이를 펴고

늘, 시큰둥한 면접관을 만나러 간다

 

떨어지는 힘으로 제자리를 잡는 일이

어디 우리네 살아가는 일뿐일까

이를 악물고 비바람을 견뎌온

꽃봉오리가 펼친 꽃잎이 떨어지는 힘으로

덜 여문 열매가 익어가고 땅은 또 씨앗을 품듯

떨어진 이파리가 겨울나무의 발목을 덮어주며

기꺼이 썩어주는 열기로 봄은 돌아오는 것

 

보라, 떨어지는 별들의 힘으로

못내 구천을 떠돌던 가난한 영혼들이

하늘에 내어준 빈자리에 자리를 잡듯

그 순간, 별똥에 소원을 비는 것도

다들 낙하의 힘을 믿고 있는 탓이다

 

 


 

 

손병걸 시인 / 단풍나무

 

 

그래, 끝을 알고 가는 길이라면

얼마나 싱거운 일인가

 

끝내 온몸이 벌게진 채

한 잎 두 잎 살점을 내려놓는

단풍나무, 너는 온전히 가을이다

 

한때는 무모하리만큼

꽁꽁 언 세상을 향해

연초록 입술을 삐쭉거리던

해맑은 모습도 있었다

 

한때는 격렬히 달궈진

세상을 식혀볼 거라고

푸른 꿈을 실어 나부끼던

시퍼런 청춘도 있었다

 

어차피 산다는 것이

다 내려놓기 위한 발버둥처럼

허무하기 이를 데 없는 뻔한 길이라고들 말하지만

오늘 아침 세상에 흩어놓는

너의 아찔한 피비린내가 없었다면

저 바람도 따라오지 않았으리니

비로소, 나도 기쁘게 가을이다

 

 


 

 

손병걸 시인 / 항해

 

 

비린내 그윽한 다대포 바닷가

꼼장어 구이집 방문 앞에

각양각색의 신발들이 뒤엉켜 있다.

 

다른 구두에 밟힌 채 일그러진 놈

에라 모르겠다 벌러덩 드러누운 놈

물끄러미 정문만 바라보는 놈

날씬한 뾰족구두에 치근대는 놈

신발 코끝 시선들이 그야말로 아수라장이다.

 

어느새 젓가락 장단 끝이 나고

사람들 한 무더기 자리를 털고 일어서자

다대포 앞바다 썰물 빠지는 소리가

꼼장어 구이집 창 너머로 아득하다.

 

연방 뭐라고 중얼거리는 꼼장어 안주 삼아

슬며시 쓴 소주 몇 잔 들이켜고는

담배 한 개비 입에 문 채 가만히 생각해 보니

잠시 정박했던 배들이

저 푸른 바다로 떠난 것이었다.

 

그 순간, 꼼장어 구이집 안으로

환한 웃음 실은 만선(滿船)들이 쏟아져 들어온다

 

 


 

손병걸 시인

1967년 강원도 동해에서 출생. 1997년 베체트씨병'으로 두 눈 실명, 시각장애 1급 장애 판정. 경희사이버대 대학원 미디어문예창작학과. 2005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등단. 저서로는 시집  『푸른 신호등, 나는 열 개의 눈동자를 가졌다』, 『통증을 켜다』와 수필 『어둠의 감시자』 등이 있음. 2006년 구상솟대문학상, 대한민국장애예술인상, 중봉조헌문학상 등을 수상. 한국장애예술인협회 회원, 한국작가회의 회원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