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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학성 시인 / 늪이 있는 생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10. 27.

이학성 시인 / 늪이 있는 생

 

 

마른 저녁길로 걸어갔다

절대 그리운 생각은

다시 고여 오지 않았다

오래 버려진 인가의 우물과

초옥 몇간의 머리 위로

저녁새는 나를 따라오는 듯

제 우듬치 너머로 바삐 사라져갔다

생이 다해도 끝나지 않을 듯한

길은 모두 어디선가 끝났다

작고 기일게 둥근 저녁해가

잠시 떠올라와 저녁길을 비추었다

아픈 몸 안의 훌쩍거림처럼

쑥대풀 아래 깊은 어둠의 그림자들이

희미하게 부서져 내렸다

마른 저녁길로 사라져갔다

 

 


 

 

이학성 시인 / 늙은 낙타의 日課

 

 

  행주를 삶아야 해! 하고 그가 주방 저편에서 지시해 왔다. 그때 난 탁자 깊숙이 고개를 처박고 미결된 문장 한 줄을 다듬고 있었다. 생의 막바지에 이른 주인공이 혈혈단신 그의 늙은 낙타와 함께 막 사막으로 떠나가려는 장면을  그리던 중이었다. 그런데 더이상 참지 못하고 그가 날카롭게 지적해 왔다. 어서 행주를 삶아! 깨끗하게 행주를 삶는 것도 내겐 문장을 다루는 일만큼이나 소중하다. 그 역시 외면하거나 거를 수  없는 주요 일과. 하지만 저 여행자의 꿈을 실현케 하는 것도 가볍게 다뤄서는 안 되는 일.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보이지 않는 거친 땅.  온종일 걸어 해지는 쪽으로 나아가려는 저들의 숭고한 꿈을 어떻게 소홀히 다룰 수 있겠는가. 때마침 에프엠라디오에서 에드워드 엘가의 위풍당당 행진곡이 흘러나왔기에 난 출발선에 선 자들의 행로에 곡의 의미 일부를 모티프로 사용해 보는 건 어떨까 하고 궁리중이었다. 무엇보다도 길을 닮고자 하는 저들에게 어떤 서막을 장엄하게 펼쳐 줄까 하던 차였다.  그런데 에석하게도 내  손은 하나에 불과했다. 잠깐 기다려 봐. 난 이 문장을 마저 마무리 지어야 해! 하고 행주에게 대꾸할 수 없다.   지금 당장 펜을 내려놓고 달려가 행주를 삶지 않으면 주방 가득 악취가 진동할 게 뻔했다.  그래서 하루 종일 걸어 온몸이 구릿빛으로 그을려서도 길을 멈추지 않으려면 저들의 고단한 순례는 잠시 뒤로 미뤄졌다.

 

 


 

이학성 시인

1961년 경기 안양에서 출생.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1990년 《세계의 문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여우를 살리기 위해』, 『고요를 잃을 수 없어』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