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학성 시인 / 늪이 있는 생
마른 저녁길로 걸어갔다 절대 그리운 생각은 다시 고여 오지 않았다 오래 버려진 인가의 우물과 초옥 몇간의 머리 위로 저녁새는 나를 따라오는 듯 제 우듬치 너머로 바삐 사라져갔다 생이 다해도 끝나지 않을 듯한 길은 모두 어디선가 끝났다 작고 기일게 둥근 저녁해가 잠시 떠올라와 저녁길을 비추었다 아픈 몸 안의 훌쩍거림처럼 쑥대풀 아래 깊은 어둠의 그림자들이 희미하게 부서져 내렸다 마른 저녁길로 사라져갔다
이학성 시인 / 늙은 낙타의 日課
행주를 삶아야 해! 하고 그가 주방 저편에서 지시해 왔다. 그때 난 탁자 깊숙이 고개를 처박고 미결된 문장 한 줄을 다듬고 있었다. 생의 막바지에 이른 주인공이 혈혈단신 그의 늙은 낙타와 함께 막 사막으로 떠나가려는 장면을 그리던 중이었다. 그런데 더이상 참지 못하고 그가 날카롭게 지적해 왔다. 어서 행주를 삶아! 깨끗하게 행주를 삶는 것도 내겐 문장을 다루는 일만큼이나 소중하다. 그 역시 외면하거나 거를 수 없는 주요 일과. 하지만 저 여행자의 꿈을 실현케 하는 것도 가볍게 다뤄서는 안 되는 일.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보이지 않는 거친 땅. 온종일 걸어 해지는 쪽으로 나아가려는 저들의 숭고한 꿈을 어떻게 소홀히 다룰 수 있겠는가. 때마침 에프엠라디오에서 에드워드 엘가의 위풍당당 행진곡이 흘러나왔기에 난 출발선에 선 자들의 행로에 곡의 의미 일부를 모티프로 사용해 보는 건 어떨까 하고 궁리중이었다. 무엇보다도 길을 닮고자 하는 저들에게 어떤 서막을 장엄하게 펼쳐 줄까 하던 차였다. 그런데 에석하게도 내 손은 하나에 불과했다. 잠깐 기다려 봐. 난 이 문장을 마저 마무리 지어야 해! 하고 행주에게 대꾸할 수 없다. 지금 당장 펜을 내려놓고 달려가 행주를 삶지 않으면 주방 가득 악취가 진동할 게 뻔했다. 그래서 하루 종일 걸어 온몸이 구릿빛으로 그을려서도 길을 멈추지 않으려면 저들의 고단한 순례는 잠시 뒤로 미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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