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주은 시인 / 옷장은 안녕하십니까
철 지난 옷들이 물음표에 걸려 있습니다 옷걸이는 물음표 같은 목을 가졌습니다 이 표현이 진부합니까?
진부하면 옷장 속으로 들어오세요 귀를 키우면 들을 수 있습니다 나란히 걸린 사생활
스카프는 뜬소문으로 휘날리고 어쩌다 보면 삼각으로 접히기도 합니다 삼각관계라니 진부합니까?
진부하면 거울을 보세요 유행이 낡고 있는 사이 육체엔 탐욕만 남습니다 탐욕이라니 진부합니까?
진부하면 옷걸이를 들춰보세요 '사랑은 고양이 오줌 같은 얼룩' 향기를 걸었는데 얼룩들이 튀어나옵니다
그날 입었던 레인코트 옷마다 그날의 인증이 있습니다 비 오는 날의 이별이라니 진저리나게 진부합니까?
그렇다면 옷장에 불을 붙이세요 불타는 옷들을 가엾게 여기지 말 것 어차피 비밀은 재가 됩니다
뼈만 남은 옷들이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돌고 있습니다
오늘, 당신의 옷장은 어떠십니까?
긴 혁대가 꿈틀거립니다
-시집 『불의 씨』
황주은 시인 / 비테프스크*
벨라, 내 이름은 마르크 지붕 위를 날아다녀요 내가 살던 언덕에는 그런 사람들이 많지요 감자를 삶던 할머니는 비테프스크*를 비프스테이크로 혼동하시고
속이 빈 사람들이나 하늘을 나는 거라던 할아버지가 굴뚝 옆에서 당근을 먹고 있을 때 곡갱이를 든 아버지와 마차를 탄 어머니가 숲으로 사라지고
상드마르스 공원에는 비가 내려요 장례식 꽃다발이 비에 젖고 비가 그치면 울음도 그치고 생선가게를 지나 푸줏간 너머로 우리의 발이 둥실 떠올라요
오늘도 악몽은 피뢰침에 걸리고 비테프스크에는 그름진 당나귀 구름이 달려와요
당신은 내가 눈 뜬 채 꾸는 꿈
벨라, 죽은 당신을 위해 식탁을 차려요 초록 암소의 젓이 마르기 전 새벽노을에 마을이 녹기 전 어서 와요, 벨라
내가 난데없는 고깃덩이가 되고 당신의 살이 포도주색으로 변하고 있어요
*비테프스크 : 샤갈의 고향.
황주은 시인의 시집 『불의 씨』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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