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학성 시인 / 촛불 아래서
그 불빛은 멀리서 왔다. 가물거리지만 여전히 밝다. 그것을 탁자위에 밝혀둔 지 오래되었다. 언젠가 그 불빛 아래서 고개를 숙이고 한참 울기도 했다. 어떤 결의를 다지고 또 다졌던가. 떠난 이의 말을 곰곰 상기하거나 부치지 못할 편지의 몇 구절을 떠올리기도 했으리라. 무슨 일이 있더라도 여전히 타오르는 불꽃 이제 보니 그 불빛은 온갖 추억들을 나보다도 더 많이 기억하고 있는 것 같다. 그에게 물으면 아스라이 잊힌 무엇이라도 다 알려줄것 같다. 하지만 언제까지 타오르게 될까. 내 숨 그친 뒤에도 계속해서 가물거리고 있을까. 지금은 그런 물음을 떠올릴 때가 아니라고 불꽃은 말하고 있는 것 같지만. 왠지 그것은 지금 이 순간 거르지 말아야 할 일처럼 여겨지기도 하는 것이다.
이학성 시인 / 강물에 띄운 편지
흐르는 물 위에 편지를 쓴다. 달무리가 곱게 피어났다고 첫줄을 쓴다. 어디선가 요정들의 아름다운 군무가 그치지 않으리니 이런 밤은 많은 것들을 떠오르게 한다고 쓴다. 저 물의 깊이를 알 수 없는 것처럼 도무지 당신의 마음도 알 수 없다고 쓴다. 이곳에 나와 앉은 지 백 년, 저 강물은 백 년 전의 그것이 아니라고 쓴다. 마음을 벨 듯하던 격렬한 상처는 어느 때인가는 모두 다 아물어 잊히리라 쓴다. 그럼에도 어떤 일은 잊히지 않으니 몇날며칠 같은 꿈을 꾸는 이유를 알 수 없다고 쓴다. 알 수 없는 게 그것뿐이 아니지만 어떤 하나의 물음이 꼭 하나의 답만 있는 게 아니기에 저물어 어두워가는 물 위에 편지를 쓴다. 그러나 강물에 띄운 편지는 누구에게도 닿지 못하고 깊은 곳으로 흘러간다.
이학성 시인 / 붕어빵
우린 말하고 싶었어 이 숨막히는 사실을 처음에는 달아오른 화덕 위에서 뜨거움 참아내느라 몇 번인가 기절하고 몸을 뒤집었는지 우리는 각자 고만고만한 방으로 들어갔지 바깥에서 억세게, 출구를 닫자 텅 빈 방에 스며드는 공포 속에서 지금껏 모든 일은 여기서 끝나누나! 틀의 엄청난 위력 앞에서 한없는 치욕을 느끼며 결국 그 집에서 풀려났을 때의 부푼 해방감, 그러나 우리는 얼마간 눈 뜬 붕어빵이고 몸이 심하게 망가진 친구도 있었지만 모두들 다시 따뜻한 꿈 꾸기 시작했지 어느 남루한 집으로 가기까지 남루한 아이들 손바닥에 오르기까지 마지막 훈기를 전하고 모두 끝장나기까지 흔들리는 봉투 속에서 둥글게 온 몸을 부둥켜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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