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연희 시인 / 세상의 기원*
검은 숲으로 간다 비밀스러운 숲의 입구, 문은 늘 조심스럽게 열린다 달이 눈꺼풀 속에서 스르르 빠져나와 검은 하늘에 열리는 밤이면 태양의 눈동자를 가진 사내들이 검은 숲을 헤치고 들어간다
따뜻한 물이 흐르는 강을 건너 붉은 밤을 품고 있는 굴곡진 언덕을 지나 검은 숲에 도달한 이들은 자신의 시간을 멈추고 젖은 기억들도 지우고 불타오르기 위해 검은 숲 깊이 자신을 던진다
숲을 통과하는 일은 시간을 이어가는 일 숲을 빠져나온 사내들은 자신을 탕진하거나 자신을 복제할 시간을 훔쳐 나온다
검은 숲의 소문은 무성해지고 숲에 매료된 사내들은 가슴 속에 우물 하나씩 판다 어머니라는 깊은 우물 그 속에 새로운 숲이 비친다 세상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프랑스 사실주의 화가 쿠르베의 작품
반연희 시인 / 뜬구름
앞서 가는 모든 것들은 거울, 거울 속에 뜬구름이 있다
금이 간 구름을 싣고 달린다 떠 있는 구름은 구름의 형식으로 달린다 금이 간 구름을 싣고 뜬구름의 형식을 쫓아가는 나는 위험하다 야생동물 보호지역, 뜬구름은 동물이 아니므로 보호되지 않는다 뜬구름이 바람결에 흩어진다 야생의 것들은 야생의 이빨로 자신을 보호한다 나는 길들여진 동물이므로 길들여진 형식으로 사라져간다 자귀나무 꽃이 속눈썹을 떨고 있다 사라져가는 나는 다리를 끌며 걷는다 무거워진 구름을 질질 끌고 간다 이빨이 생긴 구름이 내가 가야할 곳에 있던 꽃들을 따먹고 구덩이를 파놓는다 뜬구름은 폭력적이다 내 밥을 갉아먹고 나를 떠돌게 한다 아주 가끔 뜬구름은 거부할 수 없는 힘으로 나를 끌어 올린다 나는 뜬구름에 길들여지고 뜬구름의 형식으로 흩어져 간다
청춘을 끌고 다니던 뜬구름은 다른 형식의 세계 속에 아직 떠 있다 뜬구름이 뜬구름을 낳는다 눈앞의 세계가 새로운 옷을 바꿔 입는다
반연희 시인 / 여기가 아닌 이야기
하늘에 고등어 한 마리가 떠있었다 노래를 부르면 눈을 부릅뜬 고등어가 목구멍에서 흘러나왔다 고등어는 사람들 사이를 연기처럼 흘러 다녔고
아이들의 욕이 시작되어야 시계는 아침 아홉시를 가리켰다 욕을 가르치는 수업은 없었지만 욕의 기술은 고등어 굽는 냄새처럼 스며들었다 개는 때때로 교실에 뛰어들어 고등어를 쫓았다 푸른 등을 숨기며 아이들은 깔깔거렸다
학교는 아침마다 비릿해지는 선생을 물어다 놓았다 입술이 빨간 아이들은 이를 드러내며 화장실 벽에 낙서를 했다 뼈다귀만 남은 하루가 매일 수세미로 지워졌다
오래 전 나를 빌려 간 선생은 나를 다시 돌려주지 않았다
- <사이펀> 2020, 봄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학성 시인 / 촛불 아래서 외 2편 (0) | 2021.10.28 |
---|---|
황주은 시인 / 옷장은 안녕하십니까 외 1편 (0) | 2021.10.28 |
허연 시인 / 숙명 외 1편 (0) | 2021.10.28 |
함태숙 시인 / 토마토 영토 외 1편 (0) | 2021.10.28 |
김왕노 시인 / 상실의 시대 (0) | 2021.10.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