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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허연 시인 / 숙명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10. 28.

허연 시인 / 숙명

 

 

나는 땅을 발견함으로써

자두나무를 발견했고

모든 결과는 자두가 되었다

 

염탐된 사상들이 담긴

운명의 힘에 대해서 생각했다

 

붉은 우표가 붙어 있는

귀퉁이가 찢어진

그 엽서는 놀라운 것이었다

 

엄마에 반발해 타락한 아이들이

줄을 지어

죽어 갔던 날들의 기록이 쓰여 있었다

 

익숙한 햇살이 땅을 비추었지만

그림자는 매번 달랐다

결국

세상은 죽은 자들의 그림자였음을 안다

바라보면 눈이 멀게 되는 것들이 있다

 

성당 한쪽 담벼락에

섬망이 지나갔다

 

어떤 것들은 이름을 가졌다

 

 


 

 

허연 시인 / 하얀 당신

 

 

어떻게 검은 내가 하얀 너를 만나서 함께 울 수 있겠니

 

죄는 검은데

네 슬픔은 왜 그렇게 하얗지

 

드물다는 남녘 강설强雪의 밤. 천천히 지나치는 창밖에 네가 서 있다 모든 게 흘러가는데 너는 이탈한 별처럼 서 있다 선명해지는 너를 지우지 못하고 교차로에 섰다 비상등은 부정맥처럼 깜빡이고 시간은 우리가 살아낸 모든 것들을 도적처럼 빼앗아 갔는데 너는 왜 자꾸만 폭설 내리는 창밖에 하얗게 서 있는지 너는 왜 하얗기만 한지

 

살아서 말해달라고?

 

이미 늦었지

어떻게 검은 내가 하얀 너를 만나서 함께 울 수 있겠니

 

재림한 자에게 바쳐졌다는 종탑에 불이 켜졌다

 

피할 수 없는 날들이여

아무 일 없는 새들이여

 

이곳에 다시 눈이 내리려면 20년이 걸린다

 

 


 

허연 시인

1991년 《현대시세계》로 등단. 시집으로 『불온한 검은 피』, 『나쁜 소년이 서 있다』, 『내가 원하는 천사』, 『오십 미터』, 『당신은 언제 노래가 되지』 가 있음. 현대문학상, 시작작품상, 한국출판학술상 등을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