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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왕노 시인 / 상실의 시대

by 파스칼바이런 2021. 10. 28.

김왕노 시인 / 상실의 시대

 

 

가끔 네가 누구를 그리워하려고 고개를 들면 새파란 하늘이 보이지 않는다지.

깃발 하나 펄럭일 새파란 하늘 없이 살아도 그리움 없이는 못산다며

새파란 하늘 없는 들판으로 나간 너는 등뼈마다 토란잎처럼 돋아난

그리움을 팔락이는 그리운 짐승 한 마리

비루먹은 듯 몸을 벅벅 긁으며 새파란 하늘 밖으로 쫓겨난 듯 울기도 한다지.

 

새파란 하늘가로 찾아가 그리움의 명수답게 두 팔을 벌리고 서면 내 몸에서 홍방울새 깃털 같은 텔레파시가 순교의 피처럼 뿜어져 나와, 언덕을 넘고 강을 건너고 좌표를 찍은 듯 그리운 쪽으로, 빛의 속도로 달려갈 테지. 허나 하늘 하나 잃으니 하늘에 비행운처럼 띄워보던 낭만의 노래도, 가슴에서 푹푹 썩어, 하늘을 향해 부글부글 끓어올라 향긋하게 발효되던 자유로움도 사라져, 새파란 하늘을 잃으니 모든 것을 잃는 상실의 시대, 새파란 하늘 아래서 풀가동 되던 심장과 영혼이 교감하던 키스도 사라져, 햇살을 튕기며 멀리서 오는 배를 기념하여 새파란 하늘에 피어나던 뭉게구름도, 먼 산사에서 맑게 울려오던 북소리도 맥놀이현상도 사라져, 새파란 하늘 아래서 지적도를 펴놓고 몽환의 영토를 확인하던 숙인 고개의 아름다움도 사라져, 바다로 물고기 잡으러 떠나가던 낭만고양이가 달려가던 길도, 개 복숭아꽃 피던 언덕도, 하나를 잃으면 모든 것을 잃을 수밖에 없는 현실이 청동발걸음으로, 잃어버린 새파란 하늘 아래로 무채색의 하늘 아래로 뚜벅이며 돌아다녀, 새파란 하늘에 말려야 될 태양초의 꿈도 썩어 문드러져, 허나 이대로 당할 수만은 없어, 우리란 새파란 하늘의 후예, 새파란 하늘로의 복구가 우리의 대과업, 대과제, 아무렇지 않은 듯 오늘을 견디고 활발하지 않으나 조용히 그리움을 나누고, 멈췄던 새파란 하늘의 기억을 재가동시키고, 당분간 석관 속 같은 딱딱한 시간을, 견딘다는 것보다 즐긴다는 생각을 가지면 돼,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긍정적인 생각이면 메밀꽃 허옇게 이는 언덕을 넘어 새파란 하늘이 흘러와, 장돌뱅이처럼 떠돌다가 단맛 들어가는 대추나무 가지 사이로 조금씩 흘러들 수밖에 없어. 묵은 벽지를 뜯어내고 도배 하듯 꿈이 사방연속무늬로 수놓아진 새파란 하늘이 한 평 한 평 넓어져 수천수만 평 하늘을 뒤덮을 수밖에 없어. 새파란 하늘 아래가 아니라서 음지식물처럼 더 음습한 곳으로 넝쿨을 뻗치듯 손을 뻗칠 필요가 없어. 새파란 하늘의 상실로 흘렸던 눈물자국을 지우며 때로는 북방여치 같은 얼굴로 철철철 울더라도 꿈을 이야기해야 해. 가버린 것을 추억하기보다 올 것을 기대하며 유년의 숙제를 하듯 기다리는 목록을 연필심에 침을 바르는 심정으로 적어야 해. 폭염으로 달아오른 보도블록 틈 사이로 직립한 크고 작은 풀로 생존방식을 공부하고 터득해, 까짓것 견딜 수 없는 것이 이 세상에 어디 있으랴 하며 그간 걸어두었던 희망의 빗장을 개벽처럼 열어젖히는 것, 그리움도 뒤란에 걸어둔 씨 마늘처럼 익히는 것, 잘못도 없이 도망치려던 마음을 다시 고삐매고 검은 염소처럼 혜안의 눈으로 매에 울어보는 것, 허나 여전히 진행 중인 상실의 시대, 누가 새파란 하늘을 주관하고 좌지우지 하는지. 새파란 하늘이 없다 해서 우리가 버려야 될 것은 없어, 할머니 방 콩나물시루에서 맑게 떨어지는 별 푸른 밤도, 깎은 손톱을 오동나무 뿌리근처에 묻는 것도, 손톱 닮은 보랏빛 오동나무 꽃이 피었다 뚝뚝 지는 계절도, 내 사람아, 가만히 불러보는 사랑도, 첨성대 위로 열리는 신라의 하늘도, 백두대간을 종주하는 신화의 별을 찾아가는 발소리도, 우리의 정신처럼 빛나는 상고대도, 물총새 총총 우는 청정의 시간도, 마음에 든다 해서 두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해서 버리는 것은 공존을 모르고 상생을 모르는 사람의 실수, 상실의 시대라 해도 새파란 하늘만 없지. 고장 난 것은 없어. 새파란 하늘이 없다고 해서 쉬 죄에 물들거나 우왕좌왕할 필요가 없어. 우리가 만든 질서를 스스로 파괴할 필요가 전혀 없어. 상실의 시대라지만 새파란 하늘이 누군가에게 탈취 당했다는 생각은 사실이 아닐 거야. 가슴엔 아직 희망의 철자가 촘촘하게 박혀있고, 푸른 하늘이 오면 환대할 노란 어리연꽃을 돌확에 피워놓았어. 새파란 하늘에 담금질할 풋것 같은 사랑도 있어. 새파란 하늘 아래서 전지해야할 웃자란 꿈도 있어. 새파란 하늘은 새파란 하늘의 보폭으로 오면 돼. 새파란 하늘로 가꾸고 키울 텃밭에 미리 푸른 벌레가 와 진을 치고 있어. 나도 새파란 하늘이 오면 하늘로 치솟는 새보다는 수면을 박차고 튀어 올랐다가 푸른 하늘 한 조각을 물고 물로 돌아가는, 손톱만한 비늘이 온 몸의 뒤덮은 잉어가 되고 싶어. 날마다 꾼 어류의 꿈을 이루고 싶어. 새파란 하늘이 오면 새파란 하늘의 언어를 익히고, 새파란 언어로 달구질하는 사람도 보고 싶어. 야윈 내 복숭아 뼈가 새파란 하늘 언어에 물들었으면 좋겠어. 새파란 하늘 하나를 잃었으나 세상천지를 잃은 것 같은 이 기분, 지금 새파란 하늘은 안드로메다 쯤 머물고 있나. 서종 아니면 파미르고원 쯤, 오체투지로 찾아오라 설산고도 위에, 새파란 하늘이 방향을 바꿔 흘러가더라도 결국 여기로 오는 궤도로 수정할 수밖에 없어, 결국 우리는 서로를 기다려주거나 그리워하는 짝, 태양이 나의 짝, 나의 짝이 태양, 꽃의 짝은 나고 나의 짝은 꽃이고, 새파란 하늘이 나의 짝이고 나의 짝은 새파란 하늘이고, 서로를 그리워하며 육화를 꿈꾸는 짝, 새파란 하늘아 오라, 내가 너를 못 찾더라도 너를 향해 흘러가다 사라지는 구름이어도 좋아

 

상실의 시대, 잃어버렸다하면 그 때서야 잃어버린 것에 대한 애착을 가지지만 그것은 나쁜 뜻이 아니야. 애착과 함께 무릎 꿇고 참회하는 밤이 오고 잃어버린 것을 찾아 헤매는 날도 오고, 가끔 새파란 하늘을 보며 누구를 그리워하려 해도 새파란 하늘이 보이지 않지. 그리워할 사람마저 감감무소식이라 완전 상실의 시대, 그럴수록 가슴에 더 새파란 하늘, 더 그리워하는 사람이 기억으로 싱싱하게 복원되지. 그게 바로 희망이야. 이루어질 꿈이라는 거지. 그리운 짐승이 되어 밤이면 수없는 산을 넘고 강을 건너는 꿈을 꾼다지만 이 모든 것은 잠깐 지나가는 소나기 같은 것, 모든 게 정상으로 돌아올 거야. 잘 될 거야. 끝없이 절망해도 돼, 절망의 끝은 희망이란 비밀이 역학조사로 알려지고 공공연한 비밀이 된 지도 오래야. 우리가 바로 새파란 하늘을 끌어당기는 역발산보다 더 강한 중력이라는 것을 알면 돼. 우리 그 때까지 잘 살자. 어디 있던 행복해야 돼.

 

웹진 『시인광장』 2021년 8월호 발표

 

 


 

김왕노 시인

경북 포항에서 출생. 1992년〈매일신문〉신춘문예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황금을 만드는 임금과 새를 만드는 시인』, 『슬픔도 진화한다』, 『말달리자 아버지』,『사랑, 그 백년에 대하여』, 『중독-박인환문학상 수상집』『사진속의 바다』, 『그리운 파란만장』, 『아직도 그리움을 하십니까.』『게릴라』, 『이별 그 후의 날들』, 『리아스식 사랑』,『복사꽃 아래로 가는 천년』 등이 있음. 한국해양문학대상, 박인환 문학상, 지리산 문학상, 디카시 작품상, 수원문학대상, 한성기 문학상, 풀꽃 문학상, 2018년 제 11회 웹진 시인광장 선정 올해의좋은시상, 시작문학상 등 수상, 2018년 올해의 좋은 시상, 축구단 말발 단장, 한국 디카시 상임이사, 한국시인협회 부회장, 현재 문학잡지《시와 경계》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