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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조창규 시인 / 명점命點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10. 28.

조창규 시인 / 명점命點

 

 

야근하고 집으로 가는 길

1호선 병점행을 명점행으로 읽었다

라식수술한 두 눈에 밤이 번진다

출입문에 등을 기댄채 명점에 대해 생각한다

사람의 목숨이 점으로 이루어져 있다면

수많은 점들이 이어진 선으로 우리는 살아왔을 것이다

때론 직선으로, 누구는 알 수 없는 운명 탓에 선이 끊어졌겠지만

내 등에 박힌 일곱 개의 점은 어머니의 눈물점을 알고 있다

어머니는 씨받이였다

조씨 집안의 단명했던 이복형들을 내 등에 박아 놓았다

형들의 짧은 명줄이라도 이어 주면 애가 오래 살지 않을까

어머니는 가끔 내 등의 점을 세보곤 했다

노선도의 역은 점으로 이어져

지금 수원을 거쳐 세류를 지나간다

전철은 역과 역을 이으며 종점을 향해 달린다

낭창낭창 버들가지 허리를 가진 어머니의 종점은 나였다

나를 아들이라고 부를 수 없었던 어머니

평생 작은어머니로 나를 속이며 살았다

남은 목숨마저 내게 주고 종점에서 내릴 때까지

한 번도 아들인 적 없던 나는 어머니에겐 유일한 피붙이였다

병점이 가까워 올수록 빈 자리가 늘어간다

나는 어머니를 지나쳐 많은 역을 건너왔다

하나, 둘 내 수명의 남은 역을 세며

노선을 따라가는 명점들은

내 등의 일곱 개 간이역에서 잠시 정차 중이다

 

 


 

 

조창규 시인 / 좋은 간판

 

 

당신의 버르장머리를 고쳐드립니다

 

버르장머리 없는 동네 미용실

기분 잡치게 하는 입간판을 향해 헛발질을 한다

파마에 실패한 내 머리가 생활에 많은 지장을 받지만 귀찮아 고수한다

 

설렁탕 먹고 심봉사 눈뜬 집

 

놀라 들어가니 국물이 영 맹탕이다

저 상가의 얼굴에 빽빽하게 실망으로 들러붙은 명함들

 

과외도, 취직도 어렵다 공명첩을 산 증조부 나는 양반이다

감투를 쓰고부터 성형수술을 한 결혼정보회사들이 줄을 선다

짝퉁 루이뷔통, 스탠퍼드대학, 빈 컵 모두 빛 좋은 개살구 간판

나는 너를 내세우고 거울보고 콧방귀 뀐다 간판은 나의 마네킹

조상, 얼굴, 허세를 건 간판, 사이버시장의 삐끼가 된다

 

출장방문서비스 간판은 배너광고, 팝업 창, 밤의 골목으로 진화한다

 

 


 

 

조창규 시인 / 쌈

 

 

나는 쌈을 즐깁니다

재료에 대한 나만의 식견도 있죠

동굴 속의 어둠은 눅눅한 김 같아서 등불에 살짝 구울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낱장으로 싸먹는 것들은 싱겁죠

강된장, 과카몰리* 등 다양한 <쌈장 개발의 기원>

 

봄철, 입맛이 풀릴 때

나는 구멍이 송송, 뚫린 배춧잎을 새로운 쌈장에 찍어먹습니다

달콤한 진딧물 감로를 섞어 만든 장

어떤 배설물은 때로 훌륭한 식재료가 되죠

 

두꺼운 것들은 싸먹기 곤란합니다

스치면 베이는 얇은 종잇장에도 누명과 모함은 숨겨있죠

적에게 붙잡히면 품속의 기밀을 구겨 한입에 삼켜요

무덤까지 싸들고 가는 비밀도 있습니다

 

어둠의 봉지에 싸인 이 밤

구멍 난 방충망은 경계가 소홀합니다

누군가 달의 뒷장에 몰래 싸놓은 알들

나는 긴 혀로 나방을 돌돌 말아먹는 두꺼비를 증인으로 세웁니다

사각사각, 저 달을 갉아먹는 애벌레들

 

수줍은 달을 보쌈해간 개기월식

삼킬 수 없는 과욕은 역류되기도 하죠

보름달을 훔쳤다는 나의 누명이 시간의 부분식으로 벗겨지고 있습니다

 

* 아보카도를 으깬 것에 양파, 토마토, 고추 등을 섞어 만든 멕시코 식 쌈장

 

 


 

조창규 시인.가수

1980년 전남 여수 출생.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경희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박사 과정 수료. 201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쌈〉이 당선되어 등단. 현재 작사 · 작곡가로 활동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