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정호 시인 / 주머니 속에 문자 펴다
전철은 이제 서녘 들을 건너고 있다 고개 너머의 불빛을 향한 길 위에서 내 하루의 얼굴은 아직 무겁다 온몸으로 열차의 진동은 따뜻한 물을 뿌리고 꿈의 깃털들이 흩날리며 마중 온다 그 사이 주머니 속의 우체통에 누가 꽃술을 떨어뜨렸었나 보다
산 너머 또 산 그 너머 피는 구절초 한 송이 살짝 박혀 있다 보고 싶다고,
전철 입구를 나서며 나도 구름 한 잎을 입력한다 햇살 한 줄기를 띄운다 분홍빛 바다라고 쓴다 가로수 그늘 아래 기대서서 첫사랑처럼 문자를 보낸다 버려졌던 하루가 신발 끈을 매고 어느 새 휘파람 불며 가고 있다
석정호 시인 / 줄
벽 속에 내가 놓여있다. 굵은 동아 밧줄이 웅크리고 있다. 복숭아꽃이 떨어지고 아침이 되자 줄은 강을 건너간다. 붉은 먼지를 뒤집어쓴 저녁 줄은 강을 넘어서 당겨져 온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달고 베란다에 앉아서 담배를 피우던, 술을 마시고 여자와 함께 바다로 가던, 이발을 하러 뒷골목을 끌고 가던 줄
아들과 함께 아버지의 산소에서 풀을 뜯고 터덜터덜 과일봉지를 달고 돌아오던, 교회에서 웅크려 기도하던
언젠가는 거두어질 것이다. 걸어 다니는 평생의, 이 고삐 줄!
석정호 시인 / 머리카락이 길다
긴 머리카락의 나는, 어느 날 문득 주위를 돌아보았다 삼십 년 전부터 살아온 사람은 나 혼자인 듯, 그때의 유행처럼 나만 머리카락을 뚫고 나온 옛사람, 그의 삶도 흐늘거렸을 것이다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느라 손가락도 길어진 걸까 긴 손가락은 새들을 움켜잡기엔 너무 느려서, 손 안의 그것들조차 날려버린 채 하늘하늘 이별의 순간에나 어울리는 뒤돌아보기 좋은 몸짓을 하는 걸까 긴 것은 아무래도 뒷모습 배경으로만 좋을 것 같아서
짧은 머리, 탱탱한 바지차림으로 거리마다 사람들은 달리는데, 오늘도 아랑곳없이 내 안의 긴 머리카락은 바람에 날리고 있다
석정호 시인 / 이불을 털며
베란다의 창문을 열고 이불을 턴다 눈이 온 아침, 발아래로 까치가 지나가고 집안의 먼지가 날아간다 아들의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잠 뭉치들도 날아가거라 미간에서 떠나지 않는 성적표 걱정들도 날아가거라 눈 내린 마당 위에 까치처럼 날아가거라 성탄절 아침 베란다 밖으로 이불을 털면 불면을 녹이던 고른 숨결과 낯선 거리에서 황홀하던 꿈, 아내의 포근한 살비듬들이 떨어진다 아들의 속없는 미움들이 떨어진다 홀로 깬 아침 지구의 창을 열고 비불을 털면 가장 큰 별 두 개가 내 가슴에 떨어진다
석정호 시인 / 너의 꽃무늬 얼굴……발톱일까?
안과 밖은 동류항일까 배반항일까 우연히 들여다 본 경비실의 웬 고양이 한 마리 파랗게 불꽃이 튀는 저놈, 폭성은 혹 감추어진 연성 아닐까
헬스장에서 최 씨를 처음 봤을 때 유도선수였다던가, 칼눈하며 아령덩이 몸이 업어치기 한판을 뻗어올 것 같아서 나는 꼬리 박은 뒷걸음이었는데, 놀라워라 다음 순간! 새색시 입매 따라 흐르는 젤리 인사말! 어느새 발랑 올라간 나의 꼬리처럼 안과 밖의 배반은, 그러니 합당일까 부당일까
이슬비 속의 안개꽃을 보고 안쓰런 손을 내밀었다가 꽃의 무언가에 된통 쏘인 것은 청춘의 필연일까 우연일까
깊숙이 시추선 하나, 발끝으로 바다의 얼굴을 더듬고 있다
석정호 시인 / 파동
서로 엇박자 돌아가던 하늘과 땅의 어느 숨구멍 둘이 딱! 마주치는 순간처럼 이쪽저쪽이 통하고 안과 밖이 어울히면 파동이 일까? 우주의 한쪽 음계를 밟듯, 나뭇잎들이 손을 흔들어대는 그 아래에서 시집을 읽다보면 시인지 나뭇잎인지 하늘인지 풀 내음인지 모를 어떤 것들로 내 안이 채워지고 거기 나른하게 서성이는 초식동물 한 마리! 그리움처럼 부슬비가 올까 논병아리 우는 소리 어디서.
마침 읽고 있던 누구의 한 구절인지 그 썩힌 날숨이 내 안을 건드리듯 피리 소리를 냈다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창규 시인 / 명점命點 외 2편 (0) | 2021.10.28 |
---|---|
백향옥 시인 / 돌의 찬 손이 이마를 짚어주다 (0) | 2021.10.28 |
박찬일 시인 / 초록 무덤 외 2편 (0) | 2021.10.27 |
이강산 시인 / 방짜유기-놋주발 외 5편 (0) | 2021.10.27 |
유희봉 시인 / 옥향나무꽃 외 1편 (0) | 2021.10.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