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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강산 시인 / 방짜유기-놋주발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10. 27.

이강산 시인 / 방짜유기-놋주발

 

 

눈코입과 살과 뼈

육신이 투명해지도록 두들겨 맞고

비로소 밥 한 그릇 담는다

 

저 금빛 피멍

점묘화처럼 빈틈없이 찍힌 흉터

 

그러나 저들의 매질, 눈여겨보면

그건 단순히 밥그릇의 성형이 아니다

제 몸의 담장 허무는 일이다

 

내 놋주발에 밥 한 그릇 제대로 담지 못해

아침마다 숟가락 거머쥐는 것은

아직 매 덜 맞은 때문

 

손이 발이 되고 발바닥이 입이 되는

저 무한경계의 사랑

이루지 못한 때문이다

 

 


 

 

이강산 시인 / 벼랑

 

 

녹지 않은 얼음이 가슴에 박혀 있다

골이 깊어 선 자리마다 벼랑 끝이다

얼음 하나 녹이려 열 번은 머릴 깎는다

가랑빈지 눈물인지 하늘이 뿌옇다

 

 


 

 

이강산 시인 / 새

 

 

단비에 새발자국이 파묻혔어요

발자국 떠내려간 줄 새는 모를 테지요

물속으로 새 한 마리 날아간 것 못 보았지요

비를 털며, 못 본 척 모르는 척

먼 데 하늘만 올려다보겠지요

 

(『시로 여는 세상』/ 2009 겨울호 발표)

 

 


 

 

이강산 시인 / 저수지

 

 

김치찌개 냄비에서 고기가 또 낚이는 것이다

밥그릇은 어언 밑바닥이 들여다보이는데

둘이나 셋쯤 끝날 줄 알고 푹, 푹 숟가락질 했는데

냄비 기슭에서조차 돼지비늘이 튀는 것이다

물속이, 주인 여자가 두어 길 저수지여서

진흙에 빠진 듯 오도 가도 못하는 것이다

 

(『시로 여는 세상』/ 2009 겨울호 발표)

 

 


 

 

이강산 시인 / 호박죽

 

 

찬 밥 한 술 떠먹고 가을볕 쬐겠다며 계룡산 골짜기 상신리에 간다

산그늘도 허수아비도 폐가 장독대도 살 부러진 우산도 단풍이다 퍼질 대로 퍼진 배추 엉덩이도 단풍이다

 

단풍인 척, 단풍인 척 흔들리다 돌아오니 아버지는 막내 손자의 토끼가면을 거꾸로 쓴다

턱밑으로 귀가 쫑긋, 선다

 

아,

위아래를 몰라보는 토끼의 눈도 단풍이다

 

가면의 고무줄이 간지러웠나보다

빨간 색 손잡이 귀이개를 찾지 못해 늙은 아내에게 혼쭐이 난 토끼

 

빨간 색이 대수냐는 듯 새끼손가락으로 귀를 파는 토끼 눈에 그릇그릇 넘쳐나는 호박죽

내가 어제 죽집 다녀와 쌓아둔 토끼 아내의 호박죽

상신리 은행잎마냥 누우런 단풍이다

 

(『시에』2009 겨울호 발표)

 

 


 

 

이강산 시인 / 첫눈

 

 

호수는 물뿐이어서 눈물 나더라

모과나무 아래 모과뿐이어서 눈물 나더라

빙어장수 안 씨, 여름내 무사했는가

폐가 홀아비 김 형은 겨울을 어찌 견디려는가

수중엔 까치밥 한 그릇,

울며 집 나와 모자를 푹 눌러써도

피할 수 없는 눈뿐이어서 눈물 나더라

 

(『정신과 표현』2010년 신년호 발표)

 

 


 

이강산 시인

1959년 충남 금산에서 출생. 1988년 《삶의 문학》과 《실천문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세상의 아름다운 풍경』, 『물속의 발자국』『모항』이 있음. 2014,2018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아르코문학창작기금(시부문), 대전문화재단 예술창작지원금(소설) 수혜. 현재 '평상' 동인으로 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