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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찬일 시인 / 초록 무덤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10. 27.

박찬일 시인 / 초록 무덤

 

 

무덤은 빙산의 一角이란다.

 

거대한 무덤이란다, 지구가.

무덤 위에 무덤이 무덤 위에 무덤이

쌓이고 쌓여

 

단단해졌단다. 동글동글해졌단다.

 

그 위에 초록 풀이 입혀졌단다.

 

바다는 무덤 아닌가요.

죽은 자를 물에 타서

죽은 자에 죽은 자를 타서

초록 빛을 내는.

 

그렇단다. 그래서 지구가 초록이란다.

초록 무덤이란다.

 

 


 

 

박찬일 시인 / 무명(無明)

 

 

약하지만 악하다. 약한 것과 악한 것이

서로 다른 것만은 아니다. 악하다고 약하지 않지 않은 것들

약하다고 악하지 않지 않은 것을 보니 말이다.

악한데 약한 경우보다 약한데 악한 경우가 만연하다.

약한 것이 인생을 끌고 간다.

약한데 악한 자가(혹은 것이) 인생을 질질 끌고 간다.

약한데 악한 자기 인생을 질질 끌고 간다.

눈이 가벼운 것만은 아니다. 맞는 말이다.

가벼운 것이 역사를 끌고 간다.

가벼운데 무거운 것이 역사를 질질 끌고 갔다.

 

 


 

 

박찬일 시인 / 인류는 혼자인가

 

 

AD 2020년 8월 25일(원고마감날이다) 다들 어떻게 사는지 모르겠어

나만 힘든가

대범하게 넘기라고 하지만 그게 안 돼.

순간순간 멈춰.

순간순간 군힘이 들어

 

신체발부 오장육부의 힘으로 다 되지 않았나

 

할 말이 있고 하지 못하는 말이 있고

어떻게 詩人을 살아야 하나?

아버지, 아버지의 아버지를 살아야 하나

 

궁핍한 시대의 넋;

다들 어디에 있는 거야?

어떻게 사는 거야

나는 혼자인가? 인류는 혼자인가

 

 


 

박찬일 시인

1956년 춘천에서 출생. 1993년 《현대시사상》에 시 <무거움> <갈릴레오> 등 8편 발표하며 등단. 연세대학교 독문학과 및 同 대학원 졸업(문학박사), 독일 카셀대학에서 수학(박사후과정). 저서로는 시집으로 『화장실에서 욕하는 자들』, 『나비를 보는 고통』, 『나는 푸른 트럭을 탔다』, 『모자나무』, 『인류』, 『북극점 수정본』, 시론집으로 『해석은 발명이다』, 『사랑, 혹은 에로티즘』, 『근대: 이항대립체계의 실제』, 『박찬일의 시간 있는 아침』, 『시의 위의─알레고리』, 연구서로 『독일 대도시시 연구』, 『시를 말하다』, 『브레히트 시의 이해』 등이 있음. 박인환문학상, 유심작품상 등 수상. 추계예술대 문예창작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