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산 시인 / 방짜유기-놋주발
눈코입과 살과 뼈 육신이 투명해지도록 두들겨 맞고 비로소 밥 한 그릇 담는다
저 금빛 피멍 점묘화처럼 빈틈없이 찍힌 흉터
그러나 저들의 매질, 눈여겨보면 그건 단순히 밥그릇의 성형이 아니다 제 몸의 담장 허무는 일이다
내 놋주발에 밥 한 그릇 제대로 담지 못해 아침마다 숟가락 거머쥐는 것은 아직 매 덜 맞은 때문
손이 발이 되고 발바닥이 입이 되는 저 무한경계의 사랑 이루지 못한 때문이다
이강산 시인 / 벼랑
녹지 않은 얼음이 가슴에 박혀 있다 골이 깊어 선 자리마다 벼랑 끝이다 얼음 하나 녹이려 열 번은 머릴 깎는다 가랑빈지 눈물인지 하늘이 뿌옇다
이강산 시인 / 새
단비에 새발자국이 파묻혔어요 발자국 떠내려간 줄 새는 모를 테지요 물속으로 새 한 마리 날아간 것 못 보았지요 비를 털며, 못 본 척 모르는 척 먼 데 하늘만 올려다보겠지요
(『시로 여는 세상』/ 2009 겨울호 발표)
이강산 시인 / 저수지
김치찌개 냄비에서 고기가 또 낚이는 것이다 밥그릇은 어언 밑바닥이 들여다보이는데 둘이나 셋쯤 끝날 줄 알고 푹, 푹 숟가락질 했는데 냄비 기슭에서조차 돼지비늘이 튀는 것이다 물속이, 주인 여자가 두어 길 저수지여서 진흙에 빠진 듯 오도 가도 못하는 것이다
(『시로 여는 세상』/ 2009 겨울호 발표)
이강산 시인 / 호박죽
찬 밥 한 술 떠먹고 가을볕 쬐겠다며 계룡산 골짜기 상신리에 간다 산그늘도 허수아비도 폐가 장독대도 살 부러진 우산도 단풍이다 퍼질 대로 퍼진 배추 엉덩이도 단풍이다
단풍인 척, 단풍인 척 흔들리다 돌아오니 아버지는 막내 손자의 토끼가면을 거꾸로 쓴다 턱밑으로 귀가 쫑긋, 선다
아, 위아래를 몰라보는 토끼의 눈도 단풍이다
가면의 고무줄이 간지러웠나보다 빨간 색 손잡이 귀이개를 찾지 못해 늙은 아내에게 혼쭐이 난 토끼
빨간 색이 대수냐는 듯 새끼손가락으로 귀를 파는 토끼 눈에 그릇그릇 넘쳐나는 호박죽 내가 어제 죽집 다녀와 쌓아둔 토끼 아내의 호박죽 상신리 은행잎마냥 누우런 단풍이다
(『시에』2009 겨울호 발표)
이강산 시인 / 첫눈
호수는 물뿐이어서 눈물 나더라 모과나무 아래 모과뿐이어서 눈물 나더라 빙어장수 안 씨, 여름내 무사했는가 폐가 홀아비 김 형은 겨울을 어찌 견디려는가 수중엔 까치밥 한 그릇, 울며 집 나와 모자를 푹 눌러써도 피할 수 없는 눈뿐이어서 눈물 나더라
(『정신과 표현』2010년 신년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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