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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은우 시인 / 우울할 땐 어떤 음식을 먹어야 할까요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10. 29.

김은우 시인 / 우울할 땐 어떤 음식을 먹어야 할까요

 

 

기러기 백숙을 먹는 저녁

 

붉은 날개를 뜯을 때

날아오르려다 나동그라지며

뒤뚱거리는 오리가 떠올라요

 

어디선가 처량한 기러기 울음소리

 

오징어 혹은 굳은 식빵을 씹을 때나

물컹한 두부 혹은 만두를 씹을 때와는

다른 기분 다른 표정으로 식사를 해요

 

V자를 그리며 날아가는 기러기 떼

 

국물 속 대추를 씹는 순간

TV 화면에 굶어 죽어가는

아프리카 원주민 얼굴이 지나가요

 

우리는 바다낚시에 대한 언급을 멈추고

노릇노릇 구워진 고등어 살점을 내려놓아요

 

잠시 침묵, 침묵

금세 우울해져요

 

식탁의 남은 음식들이 차갑게 식어가고

 

TV 화면에 비쩍 마른 펭귄이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지나가요

 

시집 『귀는 눈을 감았다』

 

 


 

 

김은우 시인 / 호리병 속의 새

 

 

기우뚱거리는 벽이 미끄러워

눈동자가 사라지고

주둥이가 사라지고

두터운 혀만 남아 기도해요

 

흐림 흐림 그리고 흐림

벽은 지워지는 게 아니고 쌓이는 것

 

굳어진 몸이 슬슬 풀리는 나른한

오후 2시의 창을 두드리며

 

여보세요 날 좀 꺼내주세요

어디로든 끝을 향해 달릴 수 있게

 

멈추지 않고 씩씩하게 전진하는

비스듬한 공중의 시간을 원해요

 

누구든 마주치는 이에게

웃으며 반가운 인사를 건네고

 

사라진 눈송이의 행방을 찾아

떠나본 적 없는 길을 달릴 거예요

 

내겐 따뜻한 위로가 필요하지만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

 

기우뚱거리는 벽이 미끄러워

깃털이 사라지고

다리가 사라지고

 

다시 태어나는 꿈같은 건

꾸지 않을 거예요

 

-시집 『귀는 눈을 감았다』 중

 

 


 

김은우 시인

광주에서 출생. 1999년 《시와 사람》으로 등단. 시집으로 『바람도서관』과 『길달리기새의 발바닥을 씻겨주다 보았다』가 있음. 2015년 전남문화예술재단기금 수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