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상우 시인 / 파란(波瀾)
비가 온다 비가 온다라고 쓴다 고양이가 지나가고 있다 고양이가 지나가고 있다라고 쓴다 정말 고양이가 비를 맞으며 지나간다 모처럼 아프다 아프니까 착해진다 아프니까 착한 마음으로 쓴다 공들여 쓴다 오늘은 하루 종일 구름을 볼 수 있겠구나 오랜만이다 오랜만이다라고 쓴다 오랜만에 착한 마음으로 비 내리는 하늘을 바라본다 바라본다라고 쓴다 당신처럼 바라본다 당신이 나를 바라보았듯이 바라본다라고 쓴다 이 문장은 나흘째 내리는 빗소리보다 어둡다 어두운 여관방에서 내 정액을 자궁 속으로 자꾸 밀어 넣던 여자가 있었다 있었다라고 쓴다 어떤 문장은 계속 변태한다 마침내 반드시라고 쓴다 반드시를 뜻하는 한자어는 평생 심장에 꽂힌 칼을 본떠 만든 것이다 必 자를 쓰고 이를 악문다 이를 악문다라고 쓴다 이가 아프다 정말 아프다 아프니까 착해진다 착하게 살아야지 착하게 살아야지라고 다시 쓴다 착한 마음으로 라일락을 심으러 갈 것이다 이 비가 그치기 전에 그러나 비는 비가 온다라는 문장과는 상관없이 그치지 않는다 그치지 않는 빗속에서 라일락이 꽃을 피운다 한번 잘못 쓴 문장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렇게 라일락은 피어난다 나는 나를 매번 誤記한다 라일락꽃 아래 고양이가 비를 맞으며 지나간다
채상우 시인 / 세계의 끝
저것은 새다 날아가는 새다 방금 전까지 나뭇가지에 앉아 있다 날아가는 새다 저것은 나뭇가지다 부스러지고 있는 나뭇가지다 새가 앉았다 날아가자마자 부스러지고 있는 죽은 나뭇가지다 허공이다 저것은 죽은 나뭇가지들 사이로 스며들고 있는 허공이다 허공 속을 새가 날고 있다
잎이 돋는다 죽은 산수유나무 가지마다 새가 내려앉는다
이곳을 떠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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