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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차주일 시인 / 절반이 어두운 표정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10. 29.

차주일 시인 / 절반이 어두운 표정

ㅡ문패

 

 

절반이 밤인 지하방은 자세를 녹이기에 적합한 고로

잠든 사람의 자세가 제련되고 있다

 

문패 속에서 어제의 자세가 뒤척거린다

정자체가 초서체로 진화하는 것처럼

내그은 획은 가늘어지다 지워지고

힘주고 멈추어 방향을 바꾼 획의 관절에 살아남은 점들

 

별자리를 등짐 지고 귀가하는 점성가가 흙벽에 걸어둔 농기구들

녹슨 보습을 찾아와 땅속을 염탐하는 별빛들

 

만장에 쓴 맹물 붓글씨 위에 금분(金粉)을 흔들수록

듬성듬성 지워지는 자획이 뚜렷이 읽히듯

쪼그린 몸이 눌러 쓴 밭고랑이 묵정에 남아 있다

 

여적(餘滴)들의 거리를 이어

한 여자의 여적(旅跡)을 복기하는 밤

별자리를 웅크린 몸이 필체를 혼동하여 새벽이 어둡다

 

정자체로 제련된 몸이 제 몸 밖으로 태어나면

그림자는 몸을 두들겨 뒷모습을 완성할 것이다

뒷모습이 어두운 몸은 거울이 될 것이다

 

뒷모습이 어두운 타인의 앞품에 얼굴 묻어 본 사람은 안다

타인의 몸에 머물렀던 얼굴이 제 표정임을 안다

 

혼잣말은 제 몸을 읽는 사람의 자세

절반이 어두운 혼잣말과 동행하는 자가 내 몸을 바라보고 있다

 

 


 

 

차주일 시인 / 흑백을 앓는 포스트모더니즘

 

 

화사(花蛇)는 검정을 신봉하여 하얀 주검을 완공한다

사악함이 기생하는 골격을 독해한다

패배는 나태한 손발을 통해 오므로 몸속에 집어넣었다

알을 보호하는 뱀처럼 폐가를 사수하는 골목

척추 하나로 최후의 결전을 기다리고 있다

링에 오른 권투선수처럼 척추에 다리를 이어붙이고

웅크린 몸통에 팔을 접어 넣고

도착하지 않은 꽃을 응시하며

최후의 카운터펀치를 준비하고 있다

양지가 음지가 되고 젖었던 흙이 마르는 걸 보면

골목은 무채색의 더킹(ducking)으로 꿈틀거리고 있다

화사(華奢)한 침공에 패배할 줄 미리 알고

그늘이 이미 꽃그늘을 앓고 있다

미리 미래를 아파하면

새로운 감정 하나 통증 밖으로 탈출시킬 수 있는 걸까, 생각하면

폐가는 보란 듯이 내 눈 속에서 무너져 내려

과거형 감정; 무채색을 앓게 한다

제자리에서 무너지는 것이

숨긴 다리가 자세를 영영 곧춘 것이며

숨긴 팔이 카운터펀치를 날린 것임을 알아챘을 때

이미 낡았다고 약속된 무채색; 서정(抒情)은

지금껏 없었던 새로운 통증 하나를 약속받은 걸까

나를 이끌고 앞서가던 그림자가 나를 뒤따라오는 저물녘

이슬 한 방울에 기생하려고 휘몰아치는

무적(霧滴) 수만 근이 나를 혼합한다

모든 유채색을 섞으면 검정 하나 탈출한다는 말처럼

골목을 빠져나오면 알게 된다

꽃이 골목에 기생하는 것은 흑백의 척추가 절실하기 때문이다

흑백만이 돌아볼 수 있는 관절이기 때문이다

검정 씨앗을 탈출시킨 꽃은 뿌리를 보며 화사(花死)했다

 

 


 

 

차주일 시인 / 충혈된 눈

 

 

침묵하는 사람 눈동자가 선사시대 동굴벽화처럼 어지럽다

고쳐 그리고 덮어 그린 선(線)은 쉽게 해독되었다

늙은 덩굴에서 뻗은 햇덩굴처럼

어둠에서 흰자위까지 뻗친 핏발은 꽃이 진 모음이었지만

마음에 거처한 자음은 발음되지 않은 채였다

제 밖으로 미완성 첫말을 더듬거리던 이 누굴까, 생각할 때

눈과 마음의 접점이 저려왔다

여태껏 그 누구도 해본 적 없는

;눈빛을 입술에 연결하려는 그는,

사랑고백 행위를 창조하는 첫 유인원이 분명했다

내가 침묵에게 빌리던 눈빛을 그에게 빌려주자

아직 말이 아닌 군기침이 그의 눈과 마음 사이에서 쿨럭거렸고

실핏줄에 혓바늘처럼 돋는 움 몇이 보였다

그것은 내가 나도 몰래 읽어버린 결승(結繩)*이었지만

도무지 발음되지 않는 건 여전했다

그가 내 피사체인 제 모습을 내 눈 밖으로 풀어냈다

털옷을 풀듯 수많은 결승을 풀어서

말이 다다르지 못한 너머에 제 모습을 다시 묶어 짰다

짐승의 입으로 고함치는 첫 유인원의 입술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 첫 유인원은 의성어로 괴로워하고 있었다

먼 내일을 본 눈에 마음을 덧붙여

;완전한 말을 가진 그는,

눈에서 마음까지의 거리를 말하지 못하는 그는,

발음되지 않는 감정을 동굴 벽에 새기고 있었다

들소와 새의 동작에 화살을 꽂아 감정을 잇고

고래의 물너울에 첫말을 떠내려 보내고 있었다

그 모든 선(線)은 유인원의 입이 처음 달궈 낸 눈빛이었고

인류가 영영 발음하지 못해야 할 난해한 문장이었으나

침묵의 온도를 빌리면 숨김없이 드러나 버리는

미완성으로 완성된 최초의 사랑고백이었고

선(線)으로만 표기할 수 있는 감정이었다

 

*결승(結繩): 글자가 없던 시대에, 새끼줄이나 띠 따위에 매듭을 지어 기호로 삼은 문자.

 

 


 

차주일 시인

1961년 전라북도 무주에서 출생. 동국대 문화예술대학원 문예창작과 수학. 2003년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 『냄새의 소유권』(천년의시작, 2010), 『어떤 새는 모음으로만 운다』가 있음. 계간 《포지션》 편집 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