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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조정권 시인 / 같이 살고 싶은 길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10. 29.

조정권 시인 / 같이 살고 싶은 길

 

 

1

일년 중 한 일주일에서 열흘 정도, 혼자 단풍 드는 길

더디더디 들지만 찬비 떨어지면 붉은 빛 지워지는 길

아니 지워버리는 길

그런 길 하나 저녁나절 데리고 살고 싶다

 

늦가을 청평쯤에서 가평으로 차 몰고 가다 바람 세워 놓고

물어본 길

목적지 없이 들어가본 외길

땅에 흘러다니는 단풍잎들만 길 쓸고 있는 길

 

일년 내내 숨어 있다가 한 열흘쯤 사람들한테 들키는 길

그런 길 하나 늙으막에 데리고 같이 살아주고 싶다

 

2

이 겨울 흰 붓을 쥐고 청평으로 가서 마을도 지우고 길들도 지우고

북한강의 나무들도 지우고

김나는 연통 서너 개만 남겨놓고

온종일

마을과

언 강과

낙엽 쌓인 숲을 지운다.

그러나 내가 지우지 못하는 길이 있다.

약간은 구형인 승용차 바큇자국과

이제 어느정도 마음이 늙어버린

남자와 여자가 걷다가 걷다가 더 가지 않고 온 길이다

 

 


 

 

조정권 시인 / 어디 통곡할 만한 큰 방 없소?

 

 

나 일하던 공간 편집실로 찾아온 오지호 화백

수염 모시고 사랑방으로 내려간다

저 수염, 광주 사람들이 무등처럼 올려다보고 있는 수염

한자사랑책 한 권 주시더니

그동안 유럽에서 서너달 계셨다 한다

'내가 광주에 있었다면 벌써 죽었을 거요

그애들과 함께 죽었어야 했는데'

(5월 17일에는 유럽 촌구석을 헤매고 계셨다는 것이다)

조 편집장, 이 사옥에

어디 혼자 들어가 통곡할 만한 큰 방 없소?

수염 부축하며 배웅해드렸다

하늘이 살려놓은 저녁해가 인사동 골목길에서 머리 쾅쾅 부딪고 있다

혼자 통곡할 수 있는 방을 설계하는 건축가는 없다, 시인뿐이다

 

 


 

 

조정권 시인 / 나도 수북이 쌓여

 

 

문학예술사가 망했을 때 거기서 나온

정한모 전봉건 이형기 정진규 김윤희 문정희 옆에 나도 수북이 쌓여

강남 고속버스터미널 가판대 옆에 손님 기다리는 걸 보고

잠시 이런 광고문안이 기억났다

시집은 이럴 때 사용하셔도 아주 좋습니다

기름진 음식과 술을 많이 접하는 모든 분

고깃집 횟집 매운 요릿집, 미용실 병원 등 커피 대신 마실 분

귀한 손님 접대해야 하는 각 기업의 비서실 총무팀이나

연말연시를 맞아 직원들이나 협력업체 등의 선물용

반상회니 부녀회 학부모회 등 각종 모임 다과상에.

시 속에 들어 있는 좋은 성분들은

고지방 섭취로부터 우리 몸을 보호해주고

특히 값이 저렴하기 때문에 선물하고자 하는 분들에게는 아주 좋습니다

 

 


 

 

조정권 시인 / 굴다리 밑

 

 

박정만이 죽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지요

월계동의 최동호와 한잔하다가 소낙비를 만나

국철 1호선이 다니는 석계역 굴다리 아래로 피신했습니다

철길 밑 허름한 판잣집에서 파리 달라드는 족발 대짜를 뜯으며

요즘 시가 어쩌니저쩌니 토요일 오후를 한잔하고 있었습니다

국철이 머리를 밟고 위로 지날 때마다 철로가 흔들리고 대못이 튀고

집이 통째로 흔들렸지요

그때였습니다 방안으로 들어가 있던 40 후반의 주모가 우리 앞에

시집 두어 권을 보였습니다 밤늦은 시간이면 혼자 자주 오던 사람이었다고

 

 


 

 

조정권 시인 / 국도

 

 

누런 흙물에 쓸려

무너져내린 용미리 공원묘지

국도(國道)로 흘러내려온 수많은 인간들의 해골과

발에 차이는 관짝들.

해골들 입 벌리고

눈구멍 뚫린 채

현대공업사 공터와

SK주유소 마당까지 들어와

제 몸뚱이 찾아다니고 있다.

트럭과 자가용과 버스가 뒤얽힌 사십삼번 국도.

빗물에 굴러다니는 인간의 해골을 밟고

걷어차며, 축사에서 뛰쳐나온

돼지들이 국도를 돌아다니고 있다.

 

 


 

 

조정권 시인 / 자유문학 표지화

 

 

년도는 기억나지 않는다

겉장만 마음속에 넣고 다녔다

 

한 아이가 막대기 들고, 저물어가는 저녁해

찌르러 언덕을 뛰어가는

이중섭의 『자유문학』표지화

 

그 그림 떠올리며 시 공부 혼자 할 때

사과나무 밭에서 눈 올 듯한 저녁하늘도 불러내고

몇달 동안 공사 때문에 막아놓은 언덕길도 불러냈다

 

가끔은 서로 돌아가며

시계 풀어 술 사먹고 막힌 길에 겨울나무처럼 서 있었다

 

한없이 눈 맞는 겨울나무처럼이 아니라

한없이 눈 맞아주는 겨울나무같이……

 

 


 

조정권 시인 (趙鼎權, 1949년~2017년)

1949년 서울에서 출생. 중앙대 영어교육과를 졸업. 19690년 《현대시학》 창간호(3월호)에 박목월의 추천으로 등단. 시집으로 『비를 바라보는 일곱 가지 마음의 형태』, 『시편』, 『허심송』, 『하늘이불』, 『산정묘지』, 『신성한 숲』 등이 있음. 녹원문학상, 한국시인협회상, 김수영문학상, 소월시문학상, 현대문학상 등을 수상. 현재 경희사이버대학 미디어문창과 석좌대우교수. 2017년 11월 8일, 68세를 일기로 생을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