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정희 시인 / 먼 길
나의 신 속에 신이 있다 이 먼 길을 내가 걸어오다니 어디에도 아는 길은 없었다 그냥 신을 신고 걸어왔을 뿐
처음 걷기를 배운 날부터 지상과 나 사이에는 신이 있어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뒤뚱거리며 여기까지 왔을 뿐
새들은 얼마나 가벼운 신을 신었을까 바람이나 강물은 또 무슨 신을 신었을까
아직도 나무뿌리처럼 지혜롭고 든든하지 못한 나의 발이 살고 있는 신 이제 벗어도 될까, 강가에 앉아 저 물살 같은 자유를 배울 수는 없을까 생각해보지만
삶이란 비상을 거부한 가파른 계단
나 오늘 이 먼 곳에 와 비로소 두려운 이름 신이여! 를 발음해본다
이리도 간절히 지상을 걷고 싶은 나의 신 속에 신이 살고 있다.
문정희 시인 / 조각달
가지 마세요 가지 마세요
피 말리는 거역으로 하얗게 뜬 새벽
거짓말처럼 죽은 자들 속으로 당신은 떠나가고
나는 하얀 과거 하나 더 가졌다
당신 묻을 때 내 반쪽도 떼어서 같이 묻었다
검은 하늘에 조각달이 피었다
문정희 시인 / 페로비아의 사내
왜 불러 왜 불러 돌아 서서 가는 사람을 왜 왜 왜 멕시코 중부 페로비아 시장에서 투창처럼 귀에 꽂히는 한국 노래 허공에 세운 기둥을 따라 밧줄을 잡고 돌면 오색 웃음 쏟아지는 미친 해골들 사이 고꾸라진 노루처럼 눈알 속에 허공을 담고 떠돌이 물건을 팔고 있는 한국 사내 오랜만의 모국어에 마치 전갈에게 물린 듯 얼어붙은 입술 위로 떨어지는 물방울 홀로 만든 장편 대하소설, 기승전결 없이 어느 페이지를 넘겨도 폭우와 막다른 길‘ 왜 불러 왜 불러 돌아 서서 가는 사람을 왜 왜 왜 목에 걸려 안 넘어가는 아직도 쇳덩이 같은 뜬구름 한 덩이
문정희 시인 / 콩
풀벌레나 차라리 씀바귀라도 될 일이다. 일 년 가야 기침 한번 없는 무심한 밭두렁에 몸을 얽히어 새끼들만 주렁 주렁 매달아 놓고
부끄러운 낮보다는 밤을 틈타서 손을 뻗쳐 저하늘의 꿈을 감다가 접근해오는 가을만 칭칭 감았다. 이 몽매한 죄, 순결의 비린내를 가시게 하고 마른 몸으로 귀가하여 도리깨질을 맞는다. 도리깨도 그냥은 때릴 수 없어 허공 한 번 돌다 와 후려 때린다. 마당에는 야무진 가을 아이들이 뒹군다. 흙을 다스리는 여자가 뒹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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