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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윤환 시인 / 갱생更生의 뿌리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10. 29.

김윤환 시인 / 갱생更生의 뿌리

 

 

시인 다윗이 원수의 밥상을 저주하는 시편을 읽노라면 문득 오늘 아침 차려진 밥상에 모골이 송연해진다 원수의 밥상이 올무가 되고 평안의 덫이 되게 해달라는 고백은 초월적이기보다 차라리 인간적이어서 오히려 무서웠다 원수를 사랑하려면 먼저 원수가 분명히 보여야 한다 원수를 발견하는 것처럼 충격적이고 두려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저주가 사랑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저주의 강을 건너야 한다 그 참혹한 강을 건너온 시인이 그래서 위대하다 거듭남의 뿌리는 모든 것을 용서하는 곳이 아니라 원수를 가장 깊이 저주하는 고통의 길을 따라야 한다는 것을, 갱생의 뿌리는 용서가 아니라 저주였음을

 

겨울이 찾아온 새벽

저주의 닭울음이 들리고

신생의 뿌리가

누군가의 피로 물든 것을 보았다

 

- 『내가 누군가를 지우는 동안』(모악, 2021)

 

 


 

 

김윤환 시인 / 적멸 시인(寂滅詩人)

 

 

시인은

무언가 앎으로

시를 쓰는 것이 아니라

도무지 알지 못해

쓸쓸히 노래를 부르고는

우주 속으로

사라져버린다

새벽달처럼,

 

 


 

 

김윤환 시인 / 국화의 삼일

 

 

떠난 자의 빛나는 삼일을 위하여

지상의 피 뚝뚝 흘리며

검은 리본 사이 꽂힌 생화를 본다

국화와 분향의 향내가

서로를 의지해 맴도는 동안

눈물 없는 조문은 계속되었다

발인(發靷)과 함께 실려 나가는 꽃들

삼 일간 함께 울어준 꽃잎들

길 위에 떨어지고 땅 위에 떨어지고

알 수도 없는 시간위에 떨어지는 동안

꽃을 보낸 이도 꽃을 받은 이도

그 꽃말에 대하여 말하지 않았다

그 꽃씨에 대하여 말하지 않았다.

 

 


 

 

김윤환 시인 / 이슬의 시간

 

 

내가 누군가를 지우는 동안

누군가는 나를 그리며 살았겠구나

 

지우는 일과 그리는 일이

톱니가 되어 여기까지 왔구나

 

초록에도 제 꽃잎을 떨구는

그리움과 사라짐의 중간 어디쯤

 

이슬이 햇살에게

입술을 맞추고 있네

 

김윤환 시집 『내가 누군가를 지우는 동안』, 《모악》에서

 

 


 

김윤환 시인

1963년 경북 안동에서 출생. 협성대 및 同 대학원 졸업(신학석사), 단국대 대학원 문예창작과 졸업(문학박사). 1989년 《실천문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그릇에 대한 기억』 등과 사화집 『창에 걸린 예수 이야기』,  논저 『박목월 시에 나타난 모성하나님』, 『한국현대시의 종교적 상상력 연구』 등이 있음. 현재 웹진 시인광장 편집위원, 기독교 감리회 목사, 협성대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