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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채호기 시인 / 사랑은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10. 30.

채호기 시인 / 사랑은

 

 

1

사랑은 그렇게 왔다.

얼음 녹는 개울의 바위틈으로

어린 물고기가 재빠르게 파고들 듯이

사랑은 그렇게 왔다.

 

     알 수 없는 차가움이

     눈을 투명하게 한다.

 

사랑은 그렇게 왔다.

발가벗은 햇빛이 발가벗은

물에 달라붙듯이

사랑은 그렇게 왔다.

 

     수양버드나무의 그늘이 차양처럼

     물을 어둡게 한다.

 

사랑은 그렇게 왔다.

할 말 없는 수초가 말

잃은 채 뒤엉키듯이

사랑은 그렇게 왔다.

 

     가라앉아도 가라앉아도

     사랑은 바닥이 없다.

 

2

사랑은 그렇게 갔다.

미처 못다 읽은 책장을 넘겨버리듯이

사랑은 그렇게 갔다.

 

     말하려고 입 벌리면

     더러운 못물이 목구멍을 틀어막았다.

 

사랑은 그렇게 갔다.

날아가며 남겨둔 여린

가지가 자지러지며 출렁이듯이

사랑은 그렇게 갔다.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만 꽃들은 예쁘게 피어났다. 사랑은 그렇게 갔다.

이미 범람해버린 강물이 지루하게 제 수위를 회복해가듯이

사랑은 그렇게 갔다.

 

     사랑이 어루만진 부위에

     홍수가 휩쓸고 간 잔해가 남았다.

 

3

사랑은 그렇게 왔다.

사랑은 그렇게 갔다.

 

기포가 떠오르고 말할 수가 없다.

 

- 쨍한 사랑 노래 (채호기, '수련') 中

 

 


 

 

채호기 시인 / 손가락이 뜨겁다

 

 

하늘의 별은 뜨겁다. 밤은 차갑다. 벌거벗은 네 등은 차갑다. 내 손은 뜨겁다. 비가 오고 들판에서 피어오르는 뿌연 수증기. 내 손가락들이 수증기에 갇힌다. 물렁물렁해진 진흙에 발이 빠지듯 네 등을 산책하는 손가락들이 빠져든다. 네 등에 손톱 끝으로 고랑을 내며 글씨를 쓴다. 씨앗을 뿌린다.

 

흙이 글자를 끌어당긴다. 네 등에 묻힌 글자에서 싹이 돋고, 들꽃들이 피어났다. 밤은 뜨겁다. 꽃은 뜨겁다. 꽃의 향기는 시가 되어 손가락 끝에 만져진다. 네 등에 보이지 않는 무엇이 영원히 새겨졌다. 별은 뜨겁다. 손가락도 뜨겁다.

 

- 시집 ?손가락이 뜨겁다(2009, 문학과지성사)

 

 


 

 

채호기 시인 / 키스

 

 

반딧불빛 어둠 속에 속삭이는 밤의 강

깊은 수심에서 떠오르는 공기 방울들

물결은 內衣 아래로만 구불거리고

당신 몸에 범람하는 강물

풀잎 끝에 반짝이는 은밀한 숨소리

입안에 가득 고이는 키스의 물

 

 


 

채호기 시인

1957년 대구에서 출생.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와 대전대학교 국어국문과 졸업. 1988년 《창작과 비평》 여름호를 통해 등단했다. 시집으로 『슬픈 게이』(1994), 『밤의 공중전화』(1997), 『지독한 사랑』(1999), 『수련』(2002), 『손가락이 뜨겁다』(2009) 등이 있음. 제 21회 김수영문학상과 제8회 현대시 작품상 수상. 문학과지성사 편집장 및 문학과지성사 대표이사 역임. 현재 서울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