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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천서봉 시인 / 서봉氏의 가방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10. 29.

천서봉 시인 / 서봉氏의 가방

 

 

집어넣을 수 없는 것을 넣어야 한다,

는 강박관념에 시달렸다. 거리는

더 커다란 가방을 사주거나

사물을 차곡차곡 접어 넣는 인내를 가르쳤으나

바람이 불 때마다 기억은 집을 놓치고

어느 날, 가방을 뒤집어보면

낡은 공허가 쏟아져, 서봉氏의 잔돌처럼 쓸쓸해졌다.

 

모두 어디로 갔을까.

가령 흐르는 물이나 한 떼의 구름 따위,

망상에 가득 찬 머리통을 담을 수 있는, 그러니까

서봉氏와 서봉氏의 바깥으로 규정된 실체를

통째로 밑에 진열된 햇살은 너무 구체적이고

한정된 연민을 담아 팔고 있었다.

 

넣을 수 없는 것을 휴대하려는 관념과

이미 오래전 분실된 시간

거기, 서봉氏의 쓸쓸한 가죽 가방이 있다.

오래 노출된 서봉氏는 풍화되거나 낡아가기 쉬워서

바람이나 빗속에선 늘 비린 살내가 풍겼다.

무겁고 질긴 관념을 담고 다니느라

서봉氏의 몸은 자주 아프고

반쯤 벌어진 입은 늘 소문을 향해 슬프게 열려 있다.

 

천서봉 『서봉氏의 가방』, 문학동네, 2011년, 50~51쪽

 

 


 

 

천서봉 시인 / 과잉들

 

 

그해 겨울엔 속죄하듯 폭설 내렸고 별처럼 나는 여러 번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밤거리, 고깔모자의 가로등을 쓰고 걷다가 어느새 내가 어두워졌다는 것도 몰랐습니다

 

평생 미안하다는 말을 너무 많이 했습니다 그때마다 한 겹의 옷을 더 껴입었던 셈입니다

 

하루는 따뜻한 걱정들을 불러다 거한 저녁을 먹이느라 나는 한 숟가락도 뜨지 못했습니다

 

길을 잃은 문자들을 수소문하다가 내 마음에도 골목의 무늬 같은 더딘 손금이 여럿 생겼습니다

 

웃을 때도 울 때도 항상 곁에 살던 수많은 엄마들, 엄마라는 단어는 한 번도 랑그인 적 없었습니다

 

망상과 식용 사이 봄비가 붐빕니다 참 많은 당신인 것을 알겠습니다 아픔이 몰라볼 만큼 나는 살찌겠습니다

 

몸이 되기를 거부하는 거대한 결핍으로, 당신이 의식하지 않는 소소한 배경으로 천천히, 나를 소멸해 가겠습니다

 

 


 

천서봉(千瑞鳳) 시인.건축가

1971년 서울에서 출생. 2005년《작가세계》 신인상에 〈그리운 습격〉외 4편이 당선되어 등단. 시집 『서봉氏의 가방』(문학동네, 2011)이 있음. 2008년 문예진흥기금 수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