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서봉 시인 / 서봉氏의 가방
집어넣을 수 없는 것을 넣어야 한다, 는 강박관념에 시달렸다. 거리는 더 커다란 가방을 사주거나 사물을 차곡차곡 접어 넣는 인내를 가르쳤으나 바람이 불 때마다 기억은 집을 놓치고 어느 날, 가방을 뒤집어보면 낡은 공허가 쏟아져, 서봉氏의 잔돌처럼 쓸쓸해졌다.
모두 어디로 갔을까. 가령 흐르는 물이나 한 떼의 구름 따위, 망상에 가득 찬 머리통을 담을 수 있는, 그러니까 서봉氏와 서봉氏의 바깥으로 규정된 실체를 통째로 밑에 진열된 햇살은 너무 구체적이고 한정된 연민을 담아 팔고 있었다.
넣을 수 없는 것을 휴대하려는 관념과 이미 오래전 분실된 시간 거기, 서봉氏의 쓸쓸한 가죽 가방이 있다. 오래 노출된 서봉氏는 풍화되거나 낡아가기 쉬워서 바람이나 빗속에선 늘 비린 살내가 풍겼다. 무겁고 질긴 관념을 담고 다니느라 서봉氏의 몸은 자주 아프고 반쯤 벌어진 입은 늘 소문을 향해 슬프게 열려 있다.
천서봉 『서봉氏의 가방』, 문학동네, 2011년, 50~51쪽
천서봉 시인 / 과잉들
그해 겨울엔 속죄하듯 폭설 내렸고 별처럼 나는 여러 번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밤거리, 고깔모자의 가로등을 쓰고 걷다가 어느새 내가 어두워졌다는 것도 몰랐습니다
평생 미안하다는 말을 너무 많이 했습니다 그때마다 한 겹의 옷을 더 껴입었던 셈입니다
하루는 따뜻한 걱정들을 불러다 거한 저녁을 먹이느라 나는 한 숟가락도 뜨지 못했습니다
길을 잃은 문자들을 수소문하다가 내 마음에도 골목의 무늬 같은 더딘 손금이 여럿 생겼습니다
웃을 때도 울 때도 항상 곁에 살던 수많은 엄마들, 엄마라는 단어는 한 번도 랑그인 적 없었습니다
망상과 식용 사이 봄비가 붐빕니다 참 많은 당신인 것을 알겠습니다 아픔이 몰라볼 만큼 나는 살찌겠습니다
몸이 되기를 거부하는 거대한 결핍으로, 당신이 의식하지 않는 소소한 배경으로 천천히, 나를 소멸해 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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