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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최금진 시인 / 장미의 내부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8. 17.

최금진 시인 / 장미의 내부

 

 

벌레 먹은 꽃잎 몇 장만 남은

절름발이 사내는

 

충혈된 눈 속에서

쪼그리고 우는 여자를 꺼내놓는다

 

겹겹의 마음을 허벅지처럼 드러내놓고

여자는 가늘게 흔들린다

 

노을은 덜컹거리고

방안까지 적조가 번진다

 

같이 살자

살다 힘들면 그때 도망가라

 

남자의 텅 빈 눈 속에서

뚝뚝, 꽃잎이 떨어져 내린다

 

- 시집『황금을 찾아서』(창작과비평사,2011)

 

 


 

 

최금진 시인 / 아프리카에 가고 싶다

 

 

인류가 아프리카에서 비롯되었다는 이십만 년전에

나는 원숭이 비슷한 우리 할아버지 고환에 담겨

말하는 꽃도 보고 텔레파시 하는 뱀도 보고

어멈들이 어, 하면 아범들은 아, 하고 움막에 들어가

낮이고 밤이고 인류를 길어올려 흘려 보냈겠지

내 본향이 아프리카라 생각하니

평소 안 좋아하는 파프리카도

적도에 걸린 생소한 탄자니아, 소말리아가 예뻐보인다

나는 얼마나 멀리 흘러온 건가

얼굴 시커먼 우리 할아버지는 긴 막대기랑 돌덩이 서너 개 들고

얼마나 오래 걸어 전라남도 화순에 와서 화순최씨가 되었던 걸까

내 이름을 스와힐리어로는 뭐라 할까

우리는 형제니까

아동복지기금도 내고 기아 난민도 돕고

아프리카에 호적을 두었으니

나도 늙으면 아프리카에 가고 싶다

어쩌면 신께서 철조망을 쳐놓은 성경의 에덴이 있을지도 모른다

이십만 년도 더 먹은 우리 할머니가

축 늘어진 가슴을 출렁이며 날 알아보고는

다 늙은 나를 무릎에 눕히고 자장가를 불러줄까

이 세상에 없는 새의 언어로, 나무의 모국어로

아프리카, 아프리카, 너무 늙은 나를 안고 안타까워하여 주실까

 

계간 『시와 세계』 2012년 봄호 발표

 

 


 

 

최금진 시인 / 패배하는 습관

 

 

간다, 패배하러 간다, 결론부터 말하는 버릇은 나의 용기

무덤에서 나와 손을 흔들고 있는 아버지를 뒤로 두고

쫒기듯, 깨지기 위해, 망하기 위해, 버스를 타고 세상으로 돌아간다

버스가 집이었던 적도 있었다, 길들이 나를 데리고 다니며 못된 것만 가르쳐주었다

생로병사가 빌어먹을 복지정책에 달려 있는 게 아니라면

타고난 팔자에 달려 있나니

 

안 올 거지

왜 와야 하나요

 

우리는 지는 사람, 싸우기도 전에, 적을 알기도 전에

슬며시 무릎을 꿇고 패배를 위해 무얼 변명할 것인가를 생각한다

도가니탕을 좋아하는 아버지, 도기니가 닳도록 꿇어앉은 아버지

족발을 좋아하는 나, 발이 손이 되도록 비는 나

웃으면서 사과를 받아내는 사람들

웃으면서, 농담하면서 때리는 사람들

감옥에 넣지 않지만 무덤에는 넣는 사람들

 

닥치고 주무세요

다신 기다리지 마세요

 

아버지는 패배를 좋아하고

나 또한 패배를 잘 견딘다, 이를테면 매를 잘 맞는 아이처럼

 

가냐

네, 갑니다, 가고말고요, 엎드려 빌기 위해 또 가야 한단 말입니다!

 

『사랑도 없이 개미귀신』, 최금진, 창비, 2014년, 30~31쪽

 

 


 

최금진 시인

1970년 충북 제천에서 출생. 1997년《강원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에 당선되어 등단. 2001년 《창작과비평》 신인시인상 수상. 시집으로 『새들의 역사』(창비, 2007), 『황금을 찾아서』(창비, 2011), 『사랑도 없이 개미귀신』(창비, 2014)과 산문집 『나무 위에 새긴 이름』(쳔년의시작, 2014)이 있음. 2008년 제1회 오장환문학상, 2019년 제 12회 웹진 시인광장 선정 올해의좋은시 수상 등 수상. 동국대, 한양대 등 출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