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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신혜진 시인 / 얼굴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8. 17.

신혜진 시인 / 얼굴

 

 

오리 한 마리 물속으로

길게 목을 넣었다 빼기를 반복하고 있다

무얼 잃어버린 걸까

저 시퍼런 곳에

 

그때마다

호수는 원을 그린다

 

오래 들여다보면

마음이 마음을 끌고 들어간다는 거기

 

수없이 빨려들어간 나는 어디로 갔을까

한번 실컷 울어보지도 못한 채 틀어막아버린 입들

그 가슴은 어느 심연에 가라앉았을까

 

출렁이며 물결이 나아간다

얼굴이 얼굴을 밀며 나아간다호수가 호수를 끌고 나아간다

파문을 끌며

내가 너를 나아간다

 

 


 

 

신혜진 시인 / 푸른 화살

 

 

사마귀 한 마리

화살나무 위에서 다리를 버둥거리고 있다

 

시퍼런 톱날 다리로

노랑배허리노린재를 움켜잡고 씨름하고 있다, 아니

노랑배허리노린재가 뜯어먹히고 있다

 

머리가 사라지고

노란 몸통이 사라지고

마침내

사력을 다 한 노랑배허리노린재 긴 다리가 파르르 사라진다

 

화살나무 잎이 붉게 흔들리고

11월이 흔들리고

내 발밑이 흔들리고

한 세계가 사라진다

송도공원

노랑배허리노린재는 푸른 화살을 맞은 것이다

 

-2020년 {애지}로 등단

 

 


 

 

신혜진 시인 / 절벽

 

 

한낮의 무료 가로지르던 나방 한 마리가

책상 위로 떨어진다

무심코 휴지 뽑아 드는데

반짝, 멎었던 숨이 돌아와 버둥거리기 시작한다

버둥거릴수록 사납게 뒤집히는 날개

뒤집힌 날개 위에서 핑그르르 지구가 돈다

 

놀란 손을 거두자

실 끊어진 연처럼 날개가 솟구친다

좁쌀만 한 날개에 얹혀 솟구치던 세상이

두어 뼘 전방의 벽을 부딪고 떨어진다

 

어제 같고 그제 같던 오늘이 소스라친다

솟구친 속도만큼 추락이 깊다

내겐 팔만 뻗으면 닿을 높이가

그에겐 시퍼런 절벽이 되는 것을 본다

 

책상 위로

다시 무료가 내린다

잠시 허공을 반짝인 불빛 한줌이

그의 절벽 아래서 쉰다

 

2020 애지 등단작

 

 


 

신혜진 시인

경남 의령에서 출생. 2020년 계간 《애지》를 통해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