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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회 김포문학상 우수상 수상작 노수옥 시인 / 봄엔 다 그래요
우리 집 자(尺)들이 조금씩 자랐어요 그만큼 세상의 길이들은 줄었겠지요 의자들은 부풀고요 치마들은 뚱뚱해졌어요 언니들은 뒷굽을 조심해야 해요 평지들이 뒤뚱거리니까요
봄엔 다 그래요 할머니는 초록 머리카락이 새로 나고 흔들리던 이빨은 모두 새로운 뿌리가 생겨 단단해졌대요 지친 아지랑이가 노인의 이마에 와서 눕고요 삼각 혹은 길쭉한 씨앗도 모두 동그란 열매를 생각한대요
나도 새로운 말투로 말 몇 개를 바꿔야겠어요 말은 관계들 사이를 헐렁하게 풀어놓고요 이름마다 보풀이 일어나요 저녁이 되면 전등이 저벅저벅 걸어와요 조심해, 그건 넘어지는 방법이야 새로운 말투로 알려주고 싶어요
봄의 모서리가 줄어들면 태양은 더 둥굴어지고 밤은 착한 마음씨처럼 훈훈해져요 창문은 문틈에 푸른 귀를 매달아요 다 자란 삼각자는 삼각을 낭비하고요 줄자는 길이를 낭비해요 그건 헤픈 것이 아니래요 길이를, 사이를 줄이려는 거래요 봄엔 다 그렇대요
노수옥 시인 / 봄, 한 점
이것은 약속입니다 이맘때 내게 오리라는,
빽빽한 허공에 발자국을 남기고 소리 없이 다가와 예민한 나뭇가지에 손끝만 내밀고 돌아서는 당신 설핏 스쳐간 자리가 이토록 가렵습니다
손가락으로 찍어 먹은 봄, 한 점에 혀끝이 아립니다 나는 입덧처럼 헛구역질을 합니다
연둣빛 뿔로 치받기 좋은 계절 봄이 와도 소식 한 점 없는 공허한 기다림에 지쳐 그해 툇마루에 앉은 봄볕마저 쓸어냈습니다
밤새 끙끙 앓는 사이 전부를 내준 적 없는 당신 빈자리에 입춘이 오도카니 올라앉았습니다
노수옥 시인 / 시월
감자꽃 피던 마을을 지나 빈 수수밭을 지나 구월의 꼬리를 밀어내고 시월이 온다 바람에 흔들리던 코스모스의 몸짓과 모가지가 사라진 해바라기 밭도 지나왔다 정수리에 서리가 내린 시월 우듬지를 타고 오르던 물기가 공기층으로 흩어진다 휘어진 갈대의 허리에는 기러기 울음이 묻어있다 거두지 못한 늙은 호박의 이마 위로 찬바람이 다녀가는 밤 누군가는 밤새워 스웨터를 짜고 또 누군가는 부치지 못할 편지를 쓰고 있을 것이다 간이역은 귀를 세우고 놓쳐버린 발소리를 듣고 있다 바람의 속도가 빨라지면 저녁은 서둘러 창문을 닫고 속살이 붉은 가을의 내력을 읽는다 땅거미를 그러모아 이별을 준비 중인 시월 어디선가 씨 여무는 소리가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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