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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신진향 시인 / 젓갈 레시피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8. 17.

신진향 시인 / 젓갈 레시피

 

 

그럴수록 내장을 싹싹 발라야해

구두 뒤축 물러앉도록 헤엄쳐 다닌 지느러미까지

간이고 쓸개며 허파까지 뒤집어 소금 치고

패랭이 채송화 맨드라미 붉은 성기들이

박장대소하는 여름을 건너가는 사이

낯간지러움에 웃지 못하게

싹싹 비벼 놓는 거야

 

집을 나설 때 아가리 속에

차곡차곡 어제의 내장들을 쌓아둬

상처 따윈 상관없는 것처럼

두꺼워지는 얼굴을 입혀

아직 오지 않은 내일처럼

그대를 만나지 못한 어제처럼 싱싱해지기

 

뼈가 무른 족속이라 해도 상관없이

속이 없는 사람이라 해도 끄떡없이

나는 길을 헤엄쳐, 꿈을 꿔 날아올라

상기된 볼 붉어지는 독

입을 열면 삭지 않은 말이 나올까 두려워

세 겹 광목으로 칭칭 동여매

당신들의 조언이 나를 잊게 할까 겁내지 않을 거야

뚜껑이 열려도 숨 쉬는 호흡기를 지닌

오랜 시간이 있으니

뼈를 넣고 대가리를 디밀어

난 우묵한 장독으로 들어가 앉아

소금 한 바가지를 지르고

밑이 가려워 시간을 비벼대

닳고 닳고 부풀다 사라진 날 것의 이름

기억이 온전치 않았다 변명치 않고

기어이 다 녹여 낼 테야

냄새나는 몸뚱어리라도 어쩔,

찬바람에 드는 밑동 눈을 감고 생각해

샛노랗고 하얀 그 곳에 닿을

샛, 파란에 닿을

 

우습게 보지 마

진짠 말이지 곰삭은 액체의 뼈맛

그 안에 들어서면 같이 어우러져

흔적도 없는 컴컴한 수도사의

기도 같은 거야

네가 잘 있기를 바라는

이름 따윈 뭔 상관

 

 


 

 

신진향 시인 / 벼랑

 

 

그러지 마요

내 뺨을 후려친 건 해변에 두고 온

이름 하나로 충분해요

시퍼렇게 물든 눈두덩 아래 흔들리는

해저의 깊이

한밤에 목이 말라 마시는 짠물에

이 생이 버석해요

 

잊을 거예요라고 쓰지만

알잖아요

발바닥 한쪽에선 미역다발이 자란다는 거

뿌리에 핀 꽃 때문에 민물에 가까워진다는 거

 

어제는 종착역까지 걸어갔어요

돌아오는 길이 자꾸 자라요

가방이 늘어지고 있어요

늘어지는 것은 목뿐이 아니라고

바람 역사책 머리를 쳐요

 

병신 머저리 늦깎이 납작 엎드린 나무

추위에 시커멓게 웅크리고 자는 굴밭

허공에 줄을 매달고 키운 집

얇은 신발은 빨갛게 피를 흘려요

가벼운 여행이니까

버린 이름을 꺼내기가 좋은 거지요

 

온전히 떨어지는 동백

로그아웃되는 계정

벽장의 표정으로

계절을 기록해요

 

어제는 종점까지 갔었지만,

떨어진 꽃 한 송이 주웠잖아요

그러지 마요

나를 후려친 손을 향해

딱지 앉은 입술로 웃어요

 

계절을 걸고 있는 태양을 향해

피 묻은 신발을 말려요

 

 


 

 

신진향 시인 / 어쨌든 빨강

 

 

신호가 바뀌자 서둘러 얼굴을 가린 눈(雪)은

경건하게 조용해졌다

 

낡은 바퀴가 성가를 부르듯

조심스럽게 눈길을 나아가고

열린 차창에서 엷은 피막을 감싼 콧김이

폭설을 불러들인다

 

희망과 상관없이 나눠주는

성탄절 선물 같은 미소가

세 촉짜리 알약을 매달고 견딜만한

겨울을 깜빡거리며 서있다

 

뜨거운 김이 그녀를 커피 잔에 흘려놓는다

열기를 이기지 못하는 모세혈관에는

눈물이 핀다 구름이 지나는 통로에는

기적 같은 빨강이 흘러 다니고 있다

 

혈관이 철로처럼 파랑을 잇고

가늘게 엮여서 서로 교차할 때

스위치백으로 검어지는 날들,

백화점 세일 전단지는 붉고 선명하지만

찢어진 얼룩을 지나야 한다

 

모퉁이를 벗겨내면

새로 나온 빨강

자세히 보기에는

검은 덩어리로 남은

눅눅한 빨강

 

자선냄비처럼 철마다 들어앉는 딱지,

그녀가 출구를 향해 걸어갈 때

반복되는 늘 빨강

노엘, 포인세티아

 

그녀가 다급히 다른 세계로 손을 뻗는다

 

 


 

신진향 시인

2019년 월간 《모던포엠》185회 신인상 당선으로 등단. 경희 사이버 문예창작과. 모던포엠 작가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