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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한영채 시인 / 백야의 시간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11. 3.

한영채 시인 / 백야의 시간

 

 

터널을 지나온 후 밤이 사라진다 나의 몸이 기울어진 후이다 긴긴 시간이 낮을 달린다 사라지지 않는 별을 보며 삼단 커튼을 닫는다 눈을 뜨고 잠을 청했으나 눈썹엔 서릿발이 내린다 눈이 부시다 밤이 깊었으나 전등이 필요치 않다 개미들은 영문도 모르고 집안을 맴돌았다 눈 깜빡할 사이 감청색 오로라가 휩쓸고 지난 뒤였다 뿌옇게 백야는 할 말을 잊었다 내가 걸어온 길을 잃어버렸다 다시 뒤돌아 황량한 풍경을 남긴 발자국을 보며 마지막 여행자가 되고 싶었다 손잡이는 필요치 않았다 방금 스쳐 간 자리에 적막은 또 스쳐 지난다 꿈을 꾸듯 어떤 기억을 찾아가는 동안 풍경의 안쪽은 망각 속에서 자랐다 이대로 북쪽으로 북쪽으로 눈을 감고 종소리를 따라 들판을 걷는 시간이다 푸른 호숫가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린다 묵직하게 펜을 들었다 백지에 다시 점을 찍기 시작한다 지지 않는 태양 너머로 다시 여행을 떠난다

 

 


 

 

한영채 시인 / 너머 벽

 

 

당신은 벽이라 부르고

나는 너머라고 했다

 

마른 지푸라기가 물에 젖기를 바라는 동안

벽에 붙은 받침을 떼자

벼가 자란다

 

직각 위 물길은 푸른 이파리를 모르는 척

둥글게 낭떠러지로 나간다 너머

개미 떼도 모래 벽을 넘는다

 

딱딱한 공원 의자에 서로 등을 댔던

당신과 나의 거리는 얼마나 될까

 

모퉁이 사각에 대해 차마 나누지 못한 이야기

발길 멈추기를 바라는, 당신의 어긋남이

푸른 이빨을 드러낸다

 

굳은 은유를 생각하는 사이

비릿한 햇살이 등을 넘고 있다

 

당신은 떠났으나 떠나지 않은 내밀했던

시간이 벽에 기대고 있다

 

 


 

 

한영채 시인 / 어떤 외출

 

 

대문 밖 허리 잘린 느릅나무 바람 휑하다

 

지난해 홀로 잠자던 어미, 댓돌 위 신발 하나 남긴 채

링거 따라 길 떠났다

 

대추나무 마른 가지 움트듯 기다림 홀로 무성하다

 

오래된 개미집 부풀어 마당이 분주하다

 

구석구석 우주가 분주하다

 

뒤란, 무서리에 등뼈 곧추세운 소국

한 계절 또 눈이 쌓이겠다

 

바람이 문고리만 흔들다 모퉁이 돌아 나온다

 

 


 

 

한영채 시인 / 담채화

 

 

거실 구석 대바구니에 담긴

퇴직 날 받은 안개꽃

지나 온 시간이 안개처럼 모인, 그

일생이 통째로 담겨 있다

멈춘 시간으로 거실을 차지한 후

물기 사라진지 오래,

고개 숙인 쪽잠이

가물거리며 왔다 간다

꽃잎에 내려앉은 먼지처럼

왔다가 사라지는 사람들

햇살 내린 곳마다 입술이 마르고

꽃잎 사이 잔주름이 가득히

바스락 앉았다가

지구 별에서 꽃 피운 삼십 년

숨찬 시간들이 일어나는

햇살 팽팽한 오후

 

 


 

 

한영채 시인 / 휑 투옌

 

 

적막한 여름 소나무 위로

보름달 비치면

메콩강 바람 뿌옇게 인다

건기에

야자수 숲을 가르고 야성을 키우던 맨발

스물둘 첫선, 아오자이를 입고

낯선 문자를 묻고 고요에 머문다

연꽃 필 무렵, 질 무렵

흙 강 물빛을 뚫고 자리를 지키는 궁리들

꽃이 되었다, 고요가 된다

엄마와 거닐던 강둑은

어떻게, 안녕한지

공원 호수에 너울대는 앙다문 꽃잎들

수런수런 물결이 인다

한국어 수업을 받는 베트남 그녀, 휭투옌

칠월 열나흘 밤

더운 물방울들이 허공으로 솟는다

삶의 촉수가 되어 버린 꽃

속살 깊이 뿌리 내리고 있다

 

 


 

한영채 시인

경주에서 출생, 2006년 《문학예술》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 『모량시편』 『신화마을』(2016년 세종나눔 문학도서 선정),  『골목 안 문장들』 『모나크 나비처럼』이 있음. 제11회 울산문학 작품상 수상. 시작나무 동인. 울산문인협회 회원. 캘리그래피 추천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