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새하 시인 / 게임
구멍 난 발 구멍 난 자국 규칙적으로 솟은 돌에 밟혀 엎어진 몇 발자국 허락되지 않는 지침 목에 감긴 줄 마음 내키는 대로 가버리고 남겨질 수 없는 몸뚱어리 선택권 상실의 순간 4+5=10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순수는 사라졌다
반딧불이 되고 싶은 거미 빛나기 시작하는 날 가로등 불빛 아래 휘어진 담벼락 조형물에 의지한 이미테이션 키스 가짜의 유혹을 유혹하는 게임 그 달콤함
무(無)에 그려진 그림, 하고 싶은 걸 해 있다면 말이야 별을 먹어 치운 루시퍼 밤하늘에 하늘색 그대로의 몸을 붙인다 일지 않는 바람에 루시퍼가 내려온다 유혹의 게임 가운데 너와 내가 섰다
김새하 시인 / 폭설
발등에 떨어진 노트에서 삐져나온 눈보라 뼛가루가 날린다
밖을 잊었기에 밖을 보고 싶지 않다
피가 돌지 않아도 살 수 있게 되기까지 많은 연습이 필요했지만 내 몸엔 처음부터 피가 없었다
선배가 준 담배를 처음 피우던 날로부터 감옥 한 채를 짓기까지 내 몸을 만나지 못했다
우리 사이에 기억은 없다
추억이 없는 너와 내가 서로를 더듬으려 했을 때 우리는 낯선 우리를 만났다
간 쓸개를 다 빼놨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네가 내 심장에 들어온 적 없으니 나는 너의 체온을 알지 못한다 세상에 당연한 일은 없다는데 모르고 또 해버린 당연하다는 말 닿지 못하는 것들이 늘어간다
눈보라의 눈과 뼛가루가 구분 없이 하얗다
<계간 다시올 2020 겨울호>
김새하 시인 / 공정한 연애
당신이 하면 의미 있을지 모르지만 내가 한다면 무의미한 질문에 대해 생각한다
애인 있나요
커피잔을 잡으며 대답을 짐작하는 동안 아름다움이 천리향 타고 날아온다 곁에 있을땐 욕심냈지만 멀어져보니 부질없음을 알게 되었지
커피 한 모금 마시면 커피향에 숨는 많은 말 내 자리가 아닌 곳으로 돌고 돌아온 것 같은 느낌 속도보다 방향이라며 오래 기어가는 달팽이를 보면 열심히 응원했었는데
커피잔 안에서 새로운 표정을 읽어야 한다 망각하기 때문에 생기는 일들 예를 들면 폭둥우 치던 지난 여름 밤 같은 것 늑대와 양이 사랑에 빠지고 양이 늑대라는 것을 잊는 바람에 늑대를 낳은 커피잔이 깨지고 조각을 치우는 손에서는 피가 흐른다
커피잔은 깨지거나 식거나
<계간 다시올 2020 겨울호>
김새하 시인 / 요정의 이야기
민들레 홀씨를 날려 보내는 요정이 꽃잎을 떼어먹는 요정에게 이야기한다 언젠가 흰 동백꽃 속에 사는 사슴을 만나러 갈 거라고 그곳에 앉아 나비가 부르는 노래에 맞춰 날개를 비비면 물고기가 날아올라 비늘로 별을 만들 거라고 내가 혹시 돌아오는 길을 잃어도 몇 년 전에 심어놓은 재스민 향기를 따라 돌아올 수 있을 거니까 아무 걱정하지 말라고
우린 다시 만날 수밖에 없기에 나는 아무 말할 필요가 없었고 그래서 민들레 홀씨를 불고 나무가 자라는 소리를 자장가 삼을 수 있었다고 아기코끼리가 어른 코끼리가 되는 정도는 엄마 기린이 아기기린을 돌아보는 정도의 짧은 시간이라고 눈은 녹지 않아 노을에 계속 물들 수 있으니까 나는 외롭지 않다고
하늘을 가장 크게 한 바퀴 도느라 늦어지는 너를 기다리는 풀밭에 엎드린 나는 홀씨가 땅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 즐거웠다고 아침에는 아침에 피는 꽃의 소리를 귀에 걸고 저녁에는 저녁에 피는 꽃의 소리를 귀에 걸고 너를 기다리는 일은 나에게 아주 쉬운 일이라고
태양이 다가오면 휘어지는 나무의 이야기를 들어주다 보면 바람이 흘려놓은 그림자를 어디에서 주워야 하는지 알 수 있어서 가끔 그곳에 너의 흔적이 편지처럼 적혀 있기도 하다고 가끔은 달이 먼저 보고 너를 보았다는 거짓말을 적어 놔서 나는 내 날개 안으로 들어가 울기도 하지만 나의 울음소리에 급하게 돌아오는 바람을 따라 비가 내리기도 해서 네가 젖을까 봐 울 수가 없다고
김새하 시인 / 아름다운 전당포
눈이 나빠지면 나뭇잎과 나뭇잎 사이가 반짝거립니다 별이 보이면 그가 얼굴을 내밉니다
기억들이 등에 모여앉아 떠날 기미가 없습니다 기억들은 연민을 바닥에 깔고 있습니다
우린 아직 만날 시간이 아니지만, 서로가 잘 있는지 확인하려고 잠시 스칩니다 즐겁게 헤어질 수 있는 이유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 보이는 별처럼 아무것도 아닌 당신일 수 있지만 눈을 빼버릴 수 없듯이 당신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게로 오는 것과 떠나가는 것은 언제든 있습니다 올라앉은 곳의 안정감은 나의 가벼움으로 결정되는 것이더군요 기울어진 수평선에서 쏟아지는 물처럼 사람은 내게서 흘러갑니다
바람에조차 그림자를 붙여주는 우리는 하나를 배운 것만으로는 어느 곳에도 닿지 못한다는 것을 누군가에게 들키고 싶습니다
오늘 제법 절실해도 내일이면 함부로 잊어버립니다
웃기는 이야기 하나 해줄까요, 기름 없는 차의 기름을 구하러 먼 길을 떠나 만난 사람이 차를 가지고 와서 담보하란 답니다 사랑을 담보로 내놓겠습니다
잊지 말고 찾아가시기 바랍니다
<모던포엠 2021년 01월>
김새하 시인 / 아레스
흙을 만들 때 신은 알고 있었을까 투명한 벽에 동그라미를 그리는 사람은 가장 소중한 것을 훔치러 온 도둑이었죠 백마를 채찍질하는 나팔소리와 죽은 화살이 만든 파도는 여왕의 긴 머리가 바람을 잡을 때도 바람을 가르고 있어요 빛이 피와 함께 쏟아지는 날, 에메랄드 바다는 흰모래를 숨기고 얼굴을 검게 칠해요 공중을 가르는 무릎과 바닥을 떠난 발로 소리 없는 당신을 더듬는 것은 종을 치는 일처럼 명확하지만 잡을 수는 없어요 춤을 청하는 손은 겨울밤 난롯가에 앉은 것처럼 따뜻해서 고양이는 빨간 털실을 굴리는 그림을 그리고 야옹 해야 하는데 손은 어디 있나요 그릇에 담긴 흰모래 에메랄드로 변하길 기도하다 들켰어요 당신이 내 방에 들어오면 난 어쩔 수 없군요 불빛 없이 키스할 수 있는 건 뱃속에서부터 부른 노래이기 때문이에요 저녁을 초대하는 일은 숲속에서 시작되고 옷을 벗는 건 전쟁의 처음과 끝을 알리는 신호에요 아레스 정령이 흘린 눈물을 담을 그릇을 주세요 눈물은 고드름이 되는군요 창인 가요 뚫어지게 쳐다보면 연기가 흩어지는 속도만큼 심장은 빠르게 뛰어요 정확하게 돌아오는 칼끝을 보았나요 순수함은 가장 큰 무기 꿈은 언제나 푸름 밤을 보여줬고 오늘은 내일을 사랑한다고 말하죠 불꽃을 피워올릴 땐 모든 가치를 걸어야 했고 나는 재가 되었어요 당신이 떨어뜨려 놓은 숲들을 주워 바다에 심어요 아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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