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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함기석 시인 / 모래가 쏟아지는 하늘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11. 3.

함기석 시인 / 모래가 쏟아지는 하늘

 

 

화장터 도로변에 목련 꽃망울들 싱싱하다

누가 꺼내 달아 놓았을까

하얀 심장들

가지 끝 하늘엔 빈 둥지처럼 떠 있는

친구의 마지막 웃음소리

메아리처럼 꽃망울이 터진다

꽃의 육체에 갇혀 있던 문자들이 터져 나와

공기 속으로 흩어진다

언젠가 나도 가야 할 공중의 길

바람에 꽃잎들은 흩날려 공기 속을 떠돌고

홀로 남겨진 아이는 운다

 

아빠와 함께 왔다가

혼자서 돌아가야 하는 목련나무 길

<없음>이라는 말의 있음을 아이의 <눈>에서 보고

<있음>이라는 말의 없음을 뒤집힌 <곡>에서 듣는다

꽃망울 하나가 또 내 심장처럼 터진다

 

굴뚝이 내뱉는 검은 숨을 허공이 마시고 있다

연기와 함께 문자들이

허공의 폐 속 깊이 흡입되어 사라진다

언젠가 나도 가야 할 저 연기의 길

오래전 누군가의 아름다운 육체였을 저 형체 없는

연기들 공기들 빛들

 

노란 나비 한 마리

아이의 머리 위를 아물아물 날고

아이는 목련나무 꽃그늘 속에서 계속 운다

하늘에서 우수수 금빛 모래들이 쏟아진다

나는 말없이 하늘 밖 머나먼 우주를 바라보다가

아이의 젖은 뺨을 닦아준다

 

여린 뺨에 붙은 꽃잎 한 장

그 창백한 우주의 지도에 섬처럼 박혀 있는

모래 한 알, 그 무언의 점을 본다

그 순간

나도 봄도 이 목련나무 꽃길도 이미 <없는 말>이어서

하늘도 땅도 지구도 저 광대한 우주도 모두

한 알의 모래

 

내가 껴안자

아이는 두부처럼 부서지고

하늘 가득 아이의 울음만 팽팽히 커지고 있다

 

 


 

 

함기석 시인 / 개안수술집도록(開眼手術執刀錄)-執刀 58

 

 

 새벽은 아드레날린을 분비 중인 무척추동물이다  꿈 없는 잠의 늪을 뒤척이다 내과의사 Vector 초음파 이미지로 꿈의 병변을 분석 중이다 뒷면 거울에서 안개꽃 수염투성이 외과의사 벡터가 일그러진 얼굴로 웃고 있다 누가 보내 스파일까 누가 그녀의 꿈을 훔쳐가 거울 속 유리병원에 유기한 걸까   Vector가 잠옷 차림으로 마취실로 들어가자 흰옷 입은 시체들 광장이 나온다 검은 십자가 두건을 두른 신이 Vector의 노모를 잠재우고 있다  성경을 펼친 손은 새가 되어 날고 나이테처럼 퍼지는 레퀴엠 파르르 노모는 눈꺼풀 떨며 하늘을 본다 암세포 깔린 별들 사이로 살들이 떠가고 혈관들이 나무뿌리처럼 뻗어나가고 있다   여긴 어느 짐승의 내분기관일까 종양의 거리마다 불결한 산책을 끝낸 노인들이 벤치에서 틀니를 딱딱거리며 웃고 있다 Vector가 다가가자 드라이아이스처럼 증발하는 빌딩들

 

 


 

 

함기석 시인 / 개안수술집도록(開眼手術執刀錄)-執刀 49

 

 

 잠자는 라이프 교수 곁엔 와이프, 서늘한 나이프다 그녀 머리맡엔 차고 흰 접시, 교수의 귀에서 흘러나온 붉은 꿈이 학술적 사과의 자세로 놓여 있다  아내의 잠에서 탈옥한 까마귀가 사과를 쪼고 있다 그때마다 차고 위의 달이 흰 피를 흘린다 새벽녘 교수는 식은땀을 흘리며 눈을 뜬다 와이프는 은빛 나이프 자세로 요염하게 잠들어 있다 방금 꿈에서 목격한 고속고로의 죽은 말처럼, 검붉은 눈알 두 개가 창밖 사과나무에서 침실을 엿보고 있다 어떤 잠은 생살이 한 겹 한 겹 연어 살처럼 저미어져 쌓인 회 접시, 사람의 입술이 닿지 못하는 얼음 섬이야 교수는 혼잣말을 하고 담배연기를 길게 뱉는다 달은 폐가 따끔거리고 어둠 속에서 초토의 행성 닮은 얼굴 하나 사과껍질 도르르 벗겨지며 지붕으로 떨어진다 물컹물컹 와이프 눈에선 시퍼런 잠이 흘러나와 침대보를 적시고

 

 


 

 

함기석 시인 / 오르간

 

 

바다 한복판에 오르간이 환하게 떠 있다

누구의 익사체일까

 

새들이 건반에 내려앉을 때마다

밀물과 썰물이 반음 차로 울리고

 

파도가 모래 해변으로 나와

하얀 혓바닥으로

사람 발자국을 지우는 시간

 

게들이 하늘을 본다

북극성 조등(弔燈)에 환하게 불이 켜지고

원을 그리며 도는 별들 음표들 시간들

 

누가 주검을 연주하는 걸까

건반 사이에서 새들이 날아올라

캄캄한 허공으로 흰 쌀알처럼 흩어지고 있다

 

 


 

 

함기석 시인 / 힐베르트 고양이 제로와 발발이 π

 

 

수학과 이교수를 따라 제로와 발발이 π가 캠퍼스를 걷고 있다

연못 중앙엔 가시연꽃, 잉어들은

빨간 비키니 수영복을 입고 폐곡선 놀이에 빠져 있고

나무는 한쪽 발이 없는 불구의 컴퍼스여서

제로는 누구의 고통도 측정하기 싫은 우울한 짐승이다

 

좀 빨리 걸어라 발발아, 나의 말은 지름이 점점 커져서

넓이를 측정할 수 없는 비문이 되고 있다

교수님 말은 비문도 법문도 아니에요 걸어 다니는 성기예요

코를 킁킁거리며 π는 이교수가 뱉는 말을 핥는다

제로의 그림자 원은 각(角)의 나라로 망명하고 싶다

 

발발아, 인간은 누구나 비문이다

너는 먼지와 거품이고

난 진흙과 한숨으로 이루어진 바퀴고 체인이다

연못의 눈동자에 담긴 구름이 무한히 확장되어 없어지고

원은 자기의 생을 사고의 살인에 허비하고 있다

 

고로쇠나무가 흘리는 수액은

고로쇠나무의 피고 사상이고 가설이고 수식이다

수식은 몸속에서 자라는 뼈, 죽음에 뿌리를 내리는 식물이다

발발아, 너는 너의 죽음을 어떤 수식으로 증명할 거니?

원은 자신을 구성한 같은 거리의 점들을 회의한다

 

교수님, 어떤 이론은 대못이에요

눈동자에 박힌 달이 대낮에 예수처럼 울고 있다

교수님, 보세요 못에 박혀 붉은 녹물이 뚝뚝 흘러내리는 세계

말라죽은 오동나무 밑엔 검은 돌이 우는 흰 그늘

원은 구르며 보이지 않는 발발이의 꼬리 끝을 응시한다

무한한 하늘 저편에서 거대한 시계초침이 거꾸로 돌고 돈다

3바퀴 2바퀴 1바퀴 0바퀴 -1바퀴……

연못 중앙엔 폭탄처럼 터진 가시연꽃, 잉어들은

수영복을 찢고 폐곡선을 찢고 까마득한 공중으로 헤엄쳐 오르고

원의 중심 0에서 죽은 새들이 분수처럼 난다

 

 


 

함기석 시인

1966년 충북 청주에서 출생. 1993년 한양대학교 수학과를 졸업. 1992년 《작가세계》를 통해 등단. 저서로는 시집으로 『국어선생은 달팽이』(세계사, 1998)와 『착란의 돌』(천년의시작, 2002), 『뽈랑공원』(랜덤하우스, 2008) 그리고 동화 『상상력 학교』(대교출판, 2007)가 있음. 2009년 제10회 '박인환문학상' 수상. '제14회 눈높이아동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