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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장대송 시인 / 오래된 바람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11. 2.

장대송 시인 / 오래된 바람

 

 

마음이 술렁이네

사시나무를 간신히 기어오르던 매미는 벙어리였네

울지 못하니 보지고 못할 것 같아 살금살금 다가갔다네

무엇이 그리 고되어 울지 못할까

그리움을 삭히기 위해 한쪽으로만 뻗은 나뭇가지에서

젖은 몸을 털며 소리 없이 내뱉는 울음, 아주 오래된 바람

바람이 나뭇가지에 걸려 있는 것을 보았네

떠나지 못하는 게 아니라 떠나지 않고 있었네

지나는 것들이 각기 제 소리로 유혹하지만 그 자리에 있네

오 오! 이런, 숨죽였던 마음을 간신히 내뱉으니

매미가 울음보를 터뜨렸네

 

 


 

 

장대송 시인 / 섬들이 놀다

 

 

빈 벽에서 먼 바다의 섬들을 보았다

섬들이 놀고 있다

우울했다가 심심했다가 깔깔대다가 눈물 흘리다가

사는 게 노는 것이라고 했다

집이 되었다가 용이 되었다가 상여가 되었다가 구름이 되었다가 바람이 되었다가

즐겁게 노는 게 곧 비가 오려나보다

비 오면 떠날 듯한 사람이 그립다

 

『섬들이 놀다』, 정대송, 2003, 창비, 48쪽

 

 


 

 

장대송 시인 / 지워진 길

 

 

매몰된 철로가 이따금씩 보일 때 감기약을 먹은 것 같다.

누군가는 길을 지우고 있고

누군가는 길을 만들고 있고

누군가는 그 길에서 흔적 없이 사라져 가고 있다.

몽롱하다.

양옆을 잘라놓은 거미줄

땅속, 가느다란 끈 같은 길에서 무슨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이 끈적끈적한 발걸음

아교에 붙은 하루살이처럼 충격적이거나

냇물 위로 튀어 오르는 물고기처럼 신선한 낯섦

꼭 그것을 기억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댐에서 저 사각으로 잘려 쏟아지는 물들의 환호성

잘려져 나간 물들의 숨죽인 비명

지워진 길 어디쯤에서 뭉쳐 있다.

세상일은 반듯한 여백으로 지워진다는 것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그나마 땅속 어딘가에 버려진 것들이 꼭 그래도 있을 것 같다.

왜 땅속으로 사라진 길을 걸어야 제대로 걸었다고 여기고 있지?

집착의 생이 아쉽다, 하지만

그게 정신을 차린 모습으로

다른 곳을 주시하는 딴짓, 혜안이다.

팔당 철길 절개지 바위를 잡고 있는 들국화를 보는 일처럼

흙이 풀을 잡고 견디는지

풀이 흙을 잡고 견디는지

그래서 들국화라고 떠들며 다닐 수 있을 것 같다.

이 청승맞은 일들

이만저만한 일들처럼 그렇게 흘리고 다녀도 큰 허물이 되지 않을 터

난 오늘 가려진 철길 속으로 들어가는 문을 쓰윽  열고 있다.

 

 


 

장대송 시인

1962년 충남 안면도에서 출생. 한양대 국문과와 同 대학원 졸업. 199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초분(草墳)〉이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옛날 녹천으로 갔다』(창비, 1999), 『섬들이 놀다』(창비, 2003), 『스스로 웃는 매미가 있다』(문학동네, 2012)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