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선덕 시인 / 둥지를 떠난 새
마를 날이 없는 날개를 가진 새들의 저녁 식사는 언제나 소박했다.
여물지 않은 어린 새들의 부리는 날밤을 쪼아 댔다.
식탁 위 텅 빈 접시에는 여린 부리의 파편과 깨진 밤의 조각이 쏟아졌다
우리는 서로의 말을 모릅니다. 모른 척 합니다.
각자 생존의 법칙은 은밀하게 어디에서나 허용되었다
닳아서 보이지 않는 지문은 써보지 못한 대리석처럼 반들거렸다
달빛마저 지워버린 밤의 적막 날갯짓도 없이 새들이 떠났다.
우리는 서로의 몸짓을 모릅니다. 모르는척한 게 편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듬지에서 들리던 파도소리도, 새들의 노랫소리도 사라진 이 계절
이 계절의 이름을 무엇이라고 불러야 하나
오선덕 시인 / 스무살 카인
어디서 봤더라 기시감은 과거로의 회귀이다 매일 지면을 달구는 사진들이 팔십 년 광주다
그들은 무뎌지길 기다리는 것일까 시간이 흐를수록 시선은 시간의 바깥으로 향한다
이대로 잊히는 것이 더 두려울 미얀마 죽어서도 차마 떠나지 못하고 흑백사진 앞 촛불로 피어났다 미안해 카인
그녀는 군부 쿠데타에 항의하는 시위에서 경찰이 쏜 총에 머리를 맞아 숨진 최 초의 순교자가 되었다
오선덕 시인 / 죽도
대나무가 많아 죽도일까. 긴 계단 죽도록 올라가야 해서 죽도일까, 올려다보니 까마득하다. 나선형 긴 달팽이 계단을 오르는 사이 나를 부렸던 배는 도동항으로 되돌아갔다.
도동항에서 15분이면 닿는 작은 섬. 섬에는 더덕 주스를 갈아주는 부부가 있다. 땡볕사이에 길을 내고 있는 대나무 숲 터널. 그 끝, 빨려들듯 환한 햇살을 가득 품고 서 있는 타원형 문. 터널을 지나 카페에 들어선다. 부부에게서 받은 더덕 주스 한 잔에 섬과 가족의 내력을 얻는다.
밭을 일구는 새까만 늙은 농군, 까마득한 절벽아래 몸속을 온통 내보이는 바다, 안개에 몸을 감싼 관음도는 보일 듯 말듯 속을 태운다. 바다는 훤히 속을 내 보이며 저리 아무렇지 않듯 눈의 길을 열고 있다.
되돌아오는 길, 옥수수알이 날릴 때마다 찰나의 속력으로 낚아채는 붉은 눈의 괭이갈매기. 바닷속, 떨어진 옥수수 알을 찾아 자맥질하는 또 다른 괭이갈매기.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최호빈 시인 / 인테리어 외 1편 (0) | 2021.11.02 |
---|---|
장대송 시인 / 오래된 바람 외 2편 (0) | 2021.11.02 |
박찬일 시인 / 아버지 형이상학 외 2편 (0) | 2021.11.02 |
이현협 시인 / 아직은 파랑이지 외 3편 (0) | 2021.11.02 |
용혜원 시인 / 나무 백일홍 외 2편 (0) | 2021.11.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