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협 시인 / 아직은 파랑이지
오일장의 하품에 눈을 뜬 늘어진 손이 잠든 태엽을 깨웠다 병든 시계와 녹슬어가는 연장을 일으켜 여든의 신발 장수 아우가 삐걱대는 좌판을 접었다 파랑 방울무늬 셔츠가 훌쭉한 전대 위로 흘러내렸다 시계 보따리에 매달린 어깨가 어둑한 하늘에게 툭 던진다 얼음 위를 달려도 뜨거운 내래 육년만 지나면 백 살 이수다 땅거미 차오르는 막차는 연착이다 절름거리며 손풍금 타던 빈 집은 눈을 감아도 파랗다
이현협 시인 / 배후령에서
누가 이름을 지어 주셨나. 궁금해 하시던 말씀에 무릎을 꿇어 고추장에 멸치 한 줌과 술 한 잔을 올렸다 맨발의 나무는 배후령의 손길에 푸른 어깨로 서 있다 첫 날은 눈물로 올랐고 두 번째는 금시인과 흩날렸다 구름송이 눈발 뒤집어쓴 채 웃는 배후령 고개 유고 시집을 안고 새들에게 멸치를 던져주었다 고추장을 푹푹 찍어도 맵지 않은 *한바탕 웃는 사람 거기 서 있다
이현협 시인 / 683번지
싸락눈 흩날리던 수원산을 넘을 때도 몰랐지 막걸리 한 병 흔들어 덤불을 만났지 큰 절을 올렸지 늙은 산초나무가 말했지 단숨에 내려가도 보이지 않았지 아버지의 집 그 자리 앵두나무를 삼킨 희뿌연 괴물이 버티고 있었지 꿈에도 잊지 말라던 벌거벗은 683번지가 부르르 떨었고 붉게 쪼아대던 추억이 녹아 내렸지 실어증에 걸린 입술은 꿈쩍없이 주저앉고 말았지
이현협 시인 / 전설의 잔해
전설이 잠든 백양리역 투호 던지는 새순들도 늙어갈 것이다 녹슬어간다고 계절을 잊었다 해도 초록이다 알약을 삼키는 폐경기의 남자는 기차표가 없다 텅 빈 광장에 도착한 꽃잎들도 목이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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