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경 시인 / 소라껍데기
달빛에 널어놓은 파도를 목까지 끌어당겨 바다가 써 놓은 즉흥곡을 따라 부르며 이 밤 이리저리 뒤척일지 몰라 지금까지는 우리들의 계절이 아니었기에 뭉개진 땅을 찾아 점자처럼 올라온 별들을 꾹꾹 누르며 키킥 난 달아날지도 몰라 초인종소리에 뒤늦게 밖으로 뛰쳐나온 외마디 음성 목탄으로 덧칠한 당신의 대문에 지문을 남긴 이후 자꾸만 뭍으로 올라오는 인어공주의 묘비, 밀물이 발목을 감으며 리드미컬하게 올라오는 나의 무덤 그 속에서 의족들이 삐걱거리며 수천 갈래의 뼈마디를 움직여 한 통의 편지를 쓴다 돌돌말린 성대가 돛을 달고 춤을 추고 바람은 서둘러 어둠의 체인을 풀어주었다 진열장 속에서 자기 파산 신고장을 붙인 여자가 드디어 소리 내어 운다 집이 통째로 뒤꿈치를 들고 둥둥,
《시인시각》 2007년 봄호
김원경 시인 / 윤곽들
바닷물과 민물이 만나는 곳 약속들이 머무는 곳에서 부글거리는 해변은 목이 늘어난 티셔츠처럼 출렁거린다 얼지 않는 슬픔을 위해 면사포처럼 막 깔리기 시작한 저 노을 구두는 촉촉하게 젖어 곧 벗겨질 것이다
해초처럼 다른 장소에서 서로를 기다리다가 지쳐버린 곳
영안처럼 숨을 쉬는 연인이 필요할 때 어떤 바깥은 섬진강에서 남해에 이르기까지 기억의 윤곽에서 불붙는 빛의 윤곽까지 밀려오고 버려지는 것들은 입에 경계를 문다
겨울은 왜 재가 될 수 없는 걸까
더이상 고백할 것도 변명할 것도 남아 있지 않을 때 어느 별은 맨발로 뛰어내리고 전속력으로 뛰어내리고 지워지는 세상의 경계들과 비릿한 시간들은 잃어버린 것을 찾는다 우리의 간격은 늘 물컹했고 어떤 전쟁에도 맞닿는 생이 있다 바람의 손목과도 같이 오지 않을 것을 기다리며 잘못된 예보처럼, 붉은 거품처럼 나도 경계에 불과할 때가 있다
운명은 증명할 수 없다는 듯 이제 막 열고 있었다는 듯
물이 들어왔다 사라진다 이제 올 시간은 아무것도 없다
김원경 시인 / 뜻밖에 넌
시간이 지나면 누군가는 떠나가고 누군가는 남겨졌다, 지금까지 제대로 살아왔는지, 어디로 와서 어디로 흘러가는지, 궁리하던 어디선가 물결처럼 출렁이며 다가오는 것들이 있다. 가늘게 떨고 있는 생의 순간들이 방안 가득 들어선다. 아직 마르지 않는 글썽거림이 세상에서 가장 깊은 표정을 짓고 있다. 글썽거리는 건 빛나고 축축해서 맘에 든다. 무수한 너와 내가 무수한 너와 너로 밀려왔다 사라진다. 경계의 이편과 저편에서 서로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아득한 시간을 쪼갠다. 밀고 당기고 자빠지고 일어나면서 있는 그대로의 나를 만나고 나를 만나고 나를 인정하는 순간, 비로소 윤곽이 생긴다. 점과 점이 모여 이 세상 모든 선이 되듯, 애초부터 저 혼자가 아니라는 듯, 또는 저 혼자라는 듯, 있는 듯 없는 듯, 그러나 있는, 그러니 살아라 너만 그런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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