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저온 시인 / 게발선인장의
게발선인장의 발이 떨어지는 밤이다 꽃발톱이 돋은 다리와 다리가 투신(投身)하는 밤이다 투기(投棄)하는 밤이다 시푸르게 낙상하는 밤이다 추운 밤 마른 밤 비명도 없는 밤 입 닥치는 밤이다, 각자 도생의 밤, 마디라는 것 절취선이라는 것 한 번 기함(氣陷)에 하나의 절개지가 생기더라는 것 잇새에서 뿌리가 돋더라는 것, 너나 나나 꽃은 한번 꼭대기까지 밀어 올렸다는 것 열두 검문소를 통과하여 폭약을 버무린 우리보다도 소중한 피난 가방 하나를
문저온 시인 / 자기고독
자기고독이 좀 있었으면 좋겠어요, 노시인이 말했다 나는 토막 난 고등어처럼 앉아 자기고독, 읊조렸다
읊조리면서 간장과 고춧가루와 찧은 마늘과 된장을 푼 양념장을 내 몸에 끼얹었다 편으로 썬 무 위에 납작 누워
자기고독,
엄마가 죽을 때는 고등어조림 비법을 유언으로 받아 적어야 할지 모른다 내장을 긁어 낸 몸과 간장과 고춧가루와 찧은 마늘과 옆자리에 누운 모르는 고독
낙태하고 멍하니 눈 뜨던 대낮 체면을 구기거나 胎자를 果자로 바꿔 쓰고 낯을 쓸어내리는데
낯이 없다
계간 《동리목월》 2017년 겨울호
문저온 시인 / 비와 수박
비 오는 풀밭에 수박 한 통이 깨져 있소 붉은 상처가 마음껏 벌어져 있소 어젯밤 나는 수박 한 통을 창밖으로 던졌소 뛰어내리지는 않고 다만 머리 한 통을 창밖으로 던졌소 수박은 수박에 맞아 죽었소 어젯밤 수박은 칼을 댈 필요도 없이 어젯밤 나는 둥그렇게 앉아서는 죽을 수가 없어서 수박에게 수박의 전속력을 주었소 생각은 생각에 맞아 죽었소 이 아침 나는 나의 머리통과 비 맞는 내 붉은 생각을 조문하오 나는 나의 깨진 머리를 엎어놓아 주오
—월간《시인동네》2016년 10월호
문저온 시인 / 무화과나무
무화과나무 아래 무화과 냄새가 나 무화과 냄새를 맡기 전까진 무화과나무 아랜지 몰랐네 손바닥 손바닥 따라 오리기도 힘든 神은 무릎에 초록 천을 펼치고 열중하여 마름질을 하고 무화과나무는 무심히 가지 아래 한 사람을 지나게 하네 구불구불구불 엽국葉國의 국경을 걸어 들어가게 하네 21세기와 사람과 여자가 벗어 둔 신발처럼 나무 아래 서 있네 나는 눈 감아 한 세계를 걸어 잠그네 무화과나무 아래 무화과 냄새가 나 무화과 냄새를 맡기 전까진 무화과는 아직 열지 않은 줄도 몰랐네
문저온 시인 / 꽃과 개
성대를 잘리울 때 개는 어디서 우나?
꽃이 짖고 꽃집 여자 꽃술을 자른다
울음은 성대에 매달려 꺼내지나? 그건 누가 삶아먹나?
꽃이 짖고 여자는 꽃술을 딴다
울음을 삶아 먹어 그는 이제 안 우는 사람? 개같이 우는 사람?
꽃이 짖고 여자는 무표정하다 따고 싶은 것들이 있다 따버리고 싶은 것들이
가위는 날렵하고 황갈색 수술들이 바닥에 널브러진다
꽃집에는 이제 고요히 짖는 사람
ㅡ「시인정신」2016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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