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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문저온 시인 / 게발선인장의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11. 3.

문저온 시인 / 게발선인장의

 

 

게발선인장의 발이 떨어지는 밤이다

꽃발톱이 돋은 다리와 다리가

투신(投身)하는 밤이다

투기(投棄)하는 밤이다

시푸르게 낙상하는 밤이다 추운 밤 마른 밤

비명도 없는 밤 입 닥치는 밤이다, 각자

도생의 밤, 마디라는 것

절취선이라는 것

한 번 기함(氣陷)에 하나의 절개지가 생기더라는 것

잇새에서 뿌리가 돋더라는 것, 너나 나나

꽃은 한번 꼭대기까지 밀어 올렸다는 것

열두 검문소를 통과하여

폭약을 버무린

우리보다도 소중한 피난 가방 하나를

 

 


 

 

문저온 시인 / 자기고독

 

 

자기고독이 좀 있었으면 좋겠어요,

노시인이 말했다

나는 토막 난 고등어처럼 앉아

자기고독,

읊조렸다

 

읊조리면서

간장과 고춧가루와 찧은 마늘과

된장을 푼 양념장을 내 몸에

끼얹었다 편으로 썬

무 위에 납작 누워

 

자기고독,

 

엄마가 죽을 때는

고등어조림 비법을 유언으로

받아 적어야 할지 모른다

내장을 긁어 낸 몸과

간장과 고춧가루와 찧은 마늘과

옆자리에 누운 모르는 고독

 

낙태하고 멍하니 눈 뜨던 대낮

체면을 구기거나 胎자를 果자로 바꿔 쓰고

낯을 쓸어내리는데

 

낯이 없다

 

계간 《동리목월》 2017년 겨울호

 

 


 

 

문저온 시인 / 비와 수박

 

 

비 오는 풀밭에 수박 한 통이 깨져 있소

붉은 상처가 마음껏 벌어져 있소

어젯밤 나는 수박 한 통을 창밖으로 던졌소

뛰어내리지는 않고 다만 머리 한 통을 창밖으로 던졌소

수박은 수박에 맞아 죽었소 어젯밤 수박은 칼을 댈 필요도 없이

어젯밤 나는 둥그렇게 앉아서는 죽을 수가 없어서

수박에게 수박의 전속력을 주었소

생각은 생각에 맞아 죽었소

이 아침 나는 나의 머리통과 비 맞는 내 붉은 생각을 조문하오

나는 나의 깨진 머리를 엎어놓아 주오

 

—월간《시인동네》2016년 10월호

 

 


 

 

문저온 시인 / 무화과나무

 

 

무화과나무 아래 무화과 냄새가 나

무화과 냄새를 맡기 전까진

무화과나무 아랜지 몰랐네

손바닥 손바닥 따라 오리기도 힘든

神은 무릎에 초록 천을 펼치고 열중하여 마름질을 하고

무화과나무는 무심히 가지 아래 한 사람을 지나게 하네

구불구불구불 엽국葉國의 국경을 걸어 들어가게 하네

21세기와 사람과 여자가 벗어 둔 신발처럼 나무 아래 서 있네

나는 눈 감아 한 세계를 걸어 잠그네

무화과나무 아래 무화과 냄새가 나

무화과 냄새를 맡기 전까진

무화과는 아직 열지 않은 줄도 몰랐네

 

 


 

 

문저온 시인 / 꽃과 개

 

 

성대를 잘리울 때 개는 어디서 우나?

 

꽃이 짖고

꽃집 여자 꽃술을 자른다

 

울음은 성대에 매달려 꺼내지나?

그건 누가 삶아먹나?

 

꽃이 짖고 여자는 꽃술을 딴다

 

울음을 삶아 먹어 그는 이제 안 우는 사람?

개같이 우는 사람?

 

꽃이 짖고 여자는 무표정하다

따고 싶은 것들이 있다

따버리고 싶은 것들이

 

가위는 날렵하고

황갈색 수술들이 바닥에 널브러진다

 

꽃집에는 이제

고요히 짖는 사람

 

ㅡ「시인정신」2016년 가을호

 

 


 

문저온 시인

1973년 경남 진주에서 출생. 2015년 《발견》 신인상으로 등단. 한의사. 시집 : 치병소요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