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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오광석 시인 / 장화 신은 고양이*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11. 3.

오광석 시인 / 장화 신은 고양이*

 

 

오므린 입술이 앵두처럼 빨간 고양이 앞에

나는 생쥐로 변신한 오우거

잡아먹을까 잡혀 먹힐까

고민하는 두 눈동자가 반짝여

마술을 부려 거인으로 돌아가려 하면

얼른 덮쳐 오는 고양이

툭툭 치며 장난을 걸어와

온몸으로 껴안으면

두근두근 그 심장 소리가 들려

가르릉 가르릉 숨소리가 들려

나의 성을 차지하고 눌러앉은 고양이

비 오는 날이면 유난히

장화를 좋아하는 고양이 앞에

나는 비에 젖은 생쥐가 된 오우거

초롱한 눈을 바라보고 나면

무서운 거인으로 돌아가는 주문이

생각이 나질 않아

긴 장화를 신고 빗길을 또각또각

소리 내며 걷는 자그마한 고양이

낮은 우산이 전신을 가리면

눈앞에서 사라질까 두려워

자세를 낮추고 허리를 구부려

우산 속을 들여다보지

눈웃음을 치는 장화 신은 고양이

번쩍 들어 올려 거인으로 돌아온 나는

매혹 주문에 걸려

고양이를 사랑하는 오우거

 

* 장화 신은 고양이 : 프랑스 동화에서 가져옴.

 

 


 

 

오광석 시인 / 기억의 도시로 떠난 시인을 생각하는 밤

-코코(2017, 리 언크리치)

 

 

사람은 죽어서 기억의 도시로 간대

산 사람들의 기억을 먹고 산대

추억 속에 살아가다 잊히면

투명해지며 사라진대

 

이 밤이 가기 전에 나를 기억해 줘

해가 뜨기 전에 나를 불러줘

나의 문장들을 떠올려줘

새여 바람이여 자유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나는 어디부터 사라질까

나와 함께 모든 별이 꺼지고

모든 노래가 사라진다면*

세상은 죽은 사람들을 기억하지 않겠지

 

족지골 중족골 비골 경골 순서대로 사라질 거예요 아래서부터 사라져가는 스릴 아오 하체가 다 사라지면 텅 빈 엉덩이에서부터 체액과 혈액이 조금씩 빠져 사라져갈 거예요 충격적인 비주얼을 뽐내며 희미해져가는 동안 배가 터지도록 부어오른 이 거리*를 날아다닐 거예요 주렁주렁 내장들을 날리며 날아가요 아오 누구한테도 잊히지 않을 명장면 아오 기억을 먹고 살 수만 있다면 추억의 도시에서 살아갈 수만 있다면 몸 전부 사라져도 반짝이는 머리 하나만 남아도 되요

 

서서히 투명해져가다 마지막

활활 타오르는 불이 되었다가 사그라지면

그때 나는 한줄의 시가 됩니다*

 

*고 김남주 시인의 싯구절을 일부 차용함.

 

<동리목월 2020년 봄호 발표작>

 

 


 

 

오광석 시인 / 기괴한 자장가

 

 

 머리 둘 달린 아이가 낫을 들고 다닌대 달 없는 밤마다 골목 구석구석 다닌대 어느 집 창문을 넘어 들어가 잠든 아이들의머리맡에 쭈그리고 앉는데 밤마다 아이들이 잠들면 어깨어림에서 불쑥불쑥 머리가 새로 자라는데 아이들은 새로 자라나는

머리가 꾸는 기괴한 꿈에 식은땀을 줄줄 흘리는데 머리 둘 달린 아이는 자라나는 아이의 다른 머리를 싹둑 하고 잘라 낸대

아이들이 편안한 얼굴로 잠속으로 빠져들면 머리 둘 달린 아이는 휴우 한숨으로 일을 마치고 다시 창문 너머 어두운 골목으로 사라지는데 자기 머리 하나는 스스로 자르지 못해 기괴한 꿈속을 헤맬까 잠들지 못하고 무거운 눈꺼풀을 비비며 노래를 부른대 달 없는 밤마다 아이가 노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오면 어른들은 무서워 문을 꼭꼭 잠그는데 아이들은 자장가로 들리는지 새근새근 잠이 든대

 

 


 

 

오광석 시인 / 옥스퍼드의 마법사

 

 

옥스퍼드에 미친 마법사가 산다네

네모난 집에 네모난 방에

미친 마법사가 산다네

사방으로 뿌려지는 네모와 동그라미

끼우고 끼워서 세상에 없는

마법들을 쏟아 낸다네

홀로 이야기를 만들며

방에 들어앉은 그가 손뼉을 치면

네모난 집은 점점 넓어지고

그의 이야기는 점차 길어져

역사를 시작한다네

길고 짧은 모형들이 살아 움직여

성벽을 올리고 성문을 만들고 누각을 올려

그 위에 나부끼는 종이 깃발

병사들의 함성 소리가

그의 입을 통해 전해질 때

이루어지는 왕국

두 손으로 끼우고 맞춰 창조한

신기한 마법의 왕국

그 곁에 모여드는 우리는

마법사에 반한 무리들

훗날 마법사가 세상에 나서면

발칵 뒤집어질까 상상만으로 즐거워

키득키득 미치게 웃는 무리들

그 모양이 이상한지

자꾸만 뒤돌아 바라보는

옥스퍼드엔 블록에 미친 마법사가 산다네

그의 곁에는 마법사에 미친

우리가 산다네

 

 


 

 

오광석 시인 / 발록*

 

 

황홀한 사랑을 찾아 세상의 경계를 찢었지 불타는 사랑을 하고 싶어 스스로 불이 되었지 거대한 뿔은 의지가 자라 생긴 돌연변이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춤을 추는 화신 불의 세상에서 튀어 오른 그는 심장이 활활 타오르다 불사의 생물이 되었지 불꽃의 채찍을 휘두를 때마다 터지는 마음의 빙벽 불타는 몸을 껴안고 심장 깊숙이 불길을 마시면 온 몸을 돌고 도는 불의 혈액들 용암처럼 끓어오르는 유혹이 터져 붉어진 얼굴로 내미는 입술 작은 구멍과 구멍이 만나는 뜨거운 입맞춤 오므리다 벌어지면 불타는 혀가 입속에 불길을 토해내지 불의 날개가 자라나 날아오르게 하지 무너지는 세상을 느끼며 눈을 감으면 다른 세상의 문이 열리지 무거운 현실의 짐을 벗어던지고 마법 같은 사랑을 하지

 

* 톨킨의 소설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불의 마족.

 

『이계견문록』 (천년의시작, 2017년)

 

 


 

오광석 시인

1975년 제주 출생. 2014년 기괴한 자장가 외 4편으로 계간 《문예바다》신인상 을 수상하며 등단. 제주작가회의 회원. 한화손해보험 근무. 한라산문학 동인 활동 중. 시집 『이계견문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