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정순 시인 / 목련의 결심
찰나에 어쩌다 내 눈길이 거기 있었을까
나와 그 허공이 12시에 잠시 포개지는 시곗바늘처럼 얽혀버렸다
떨어지는 꽃잎과 잠깐 스친 듯도 한데,
사기그릇 깨지듯 하얗게 흩어지는 꽃잎의 파편들 예정된 시간이 다녀간다
미처 결심을 굳히지 못한 꽃잎들이 쏟아져 보도블록이 어지럽다 바닥을 견디는 일이 만만치 않다
잠시 시간이 멈췄다 흐르고 바람이 응시하는 목련나무 우듬지
단명의 봄이 툭, 제 목을 자른다
스물셋 눈부신 생, 흰나미 한 마리 가볍게 허공에 길을 내며 날아오른다
신정순 시인 / 빛을 팝니다
2호선 낙성대역 한 사내가 옆자리에 앉는다
낡은 가방 속에 손가락만한 손전등이 가득하다 하나를 꺼내 만지작거리다 다시, 앉는 사내 손전등도 어두운 상자 속에 주저앉는다 정지된 동작에 생의 한끝이 골똘하다 내 눈과 마주친 머쓱한 웃음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포개진 어둠들 지폐 한 장으로 켤 수 있는 빛 남자가 차곡차곡 담아 넣은 결심은 초행길인지 쉽게 열리지 않는다
손등에 선명한 화상 자국 감당할 수 없는 어떤 뜨거운 불길이 스쳐 갔을까 불기운을 피해 동굴로 숨어들어 빛을 팔지만 여전히 어둠인 남자 휘어진 척추 사이 망설임이 무겁다
준비한 말을 입 속에 담고 다음 칸으로 더듬더듬 넘어간다
신정순 시인 / 상쾌한 세탁소
평지보다 계단이 익숙한 남자 깔밋한 셔츠와 주름치마를 들고 주름 잡힌 계단을 오른다 울림이 좋은 아파트 복도는 중저음 목소리를 칸마다 배달해 준다
한때 목포 앞바다를 주름잡으며 살던 박 씨 불끈거리는 과거를 묵직한 쇳덩이로 눌렀다 질풍노도를 다루는 법을 간판에 걸어두고 마음을 다잡았다
어느 날 한 여자가 골목 모퉁이를 돌아 나가고 생의 굴곡을 들여다보며 주름을 잡거나 어긋난 생을 반듯하게 펴 보아도 문신으로 남아 있는 각오는 봄날의 골목을 뛰쳐나간다
흙탕물이 튀어 오를 때마다 얼룩진 생을 들고 되돌아와 천장에 장대로 다짐을 매달아 둔 사내
누군가의 출근길이 걸리고 때를 놓친 퇴근이 구겨져 돌아오는 곳 오늘도 얼룩을 지우고 있다
비가 개이면 가슴의 얼룩도 상쾌하게 사라질 것이다
-《문예바다》2014년 겨울호
신정순 시인 / 호랑이와 토끼 사이
가시내가 범띠면 팔자가 드세다며 이듬해 어머니는 나를 토끼띠로 호적에 올렸다 어디 가서 범띠라 하지 마라 당부하던 어머니 팔자를 바꿀 수만 있다면 손바닥에 칼금이라도 새겨 넣을 기세였다
누군가 띠를 물으면 호랑이와 토끼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끝내 토끼 한 마리를 꺼내놓곤 했다 소심한 토끼를 닮아 마음을 자주 다치고 남의 말에 귀가 얇아 생의 고비에서 기우뚱거리기도 했다
어머니의 바람과 나의 본성이 뒤섞인 후천적 이중유전자 가끔 구석에 웅크린 호랑이가 사나워지면 다독이는 법을 알아 잠재워놓았다
당신이 쥐띠라 고단하게 산다는 어머니 왜 띠를 바꾸지 않았냐고 묻고 싶었지만 우긴다고 되는 일이 아니란 걸 당신은 알고 있었다 지병이 길어지며 밤잠을 못자는 것도 야행성인 쥐 탓이란다 업어 가도 모르는 나의 밤잠을 생각하면 호랑이는 야행성이 아니었나, 다시 분류해야 하나
어릴 적 별호가 머루눈이었다는 어머니 밤에 마주친 놀란 쥐눈처럼 까맣게 반짝였을 두 눈이 생의 끝자락에서 흐릿하다
『시인정신』2015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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