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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서정연 시인 / 또는 상처에 대하여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11. 4.

서정연 시인 / 또는 상처에 대하여

 

 

언어는 잊어도 몸은 기억하고 있다

몸은 기억하고 있어도 말은 잃었다

소라껍질처럼 웅얼거리는 몸통은 있어도

소리는 나오지 않는다

밑동이 잘린 나무처럼 쓰러지던

그날 이후, 잃어버린 것은 누구인가

놓아버린 것은 무엇인가 어느 곳에 두고 온 것인가

명치끝인가 갈비뼈 언저리인가 가슴께 어디쯤인가

겨드랑이인가 입술 젖꼭지 배꼽 샅 어딘가에서

캄캄한 씨앗 같은 어둠을 품고 햇살을 기다리는 것

소리를 찾느라 붉은 숨결을 고르는 여러 날

들판에 나불대는 무꽃이거나 배추꽃

새벽이슬 같은 냉이꽃이거나 상추꽃

부추꽃이거나 갓꽃이듯이

흔들리면서 발화하는

오래 기다려야 볼 수 있는 꽃,

또는 상처에 대하여

 

 


 

 

서정연 시인 / 새벽

 

 

연필을 깎는다. 검은 연필심은,

벼랑 끄트머리의 촉처럼 날이 선 눈빛이다.

속이 다 타버려서 차라리 투명하다.

그 눈빛 낯이 익다.

 

어디서 보았을까.

투명한 눈빛으로 뜨거움을 견디고 있는

초승달처럼 푸른,

은장도 벼린 날빛 같은 것.

제 살 속에 파묻어둔 혼 같은 것.

비린 첫사랑 같은 그것.

 

연필을 깎아 엎드려서 시를 쓴다.

 

-서정연 시집 목련의 방식에서

 

 


 

서정연 시인

전남 나주에서 출생. 2012년 《심상》으로 등단. 시집으로 『목련의 방식』(문학의전당, 2016)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