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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은호 시인 / 슈나우저*를 읽다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11. 4.

김은호 시인 / 슈나우저*를 읽다

 

 

텃밭 가장자리를 곡괭이로 파서 열고 흰 무명천에 책을 싸서 묻는다

삽으로 흙을 뿌려 덮으며 흰머리멧새 울음소리도 몇 송이 얹혀준다

오랫동안 읽었던 부드럽고 따듯한 이야기들이 땅속으로 스며든다

 

사방팔방 무너져 내려 집에 쌀 팔 돈조차 없던 때

길에서 주워온 슈나우저 한 권

 

검고 부드러운 털로 덮인 표지에 반짝반짝 두 개의 별이 박힌 책

첫 장부터 끝까지 팔짝팔짝 뛰어다니며 풍성한 수염 출렁거리던

가끔 붉은 혀로 세상을 핥아주거나 컹컹 꾸짖을 줄도 아는

슈나우저는 따뜻한 난로가 부록으로 묶인 책이었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유쾌한 문장들 쏟아지고

우리 집 웃음소리 굴뚝처럼 높아갔다

 

책 독자 사이를 오가던 수많은 사연 잿빛으로 물든 날

'우리 함께 고통을 이겨냈어요' 이별의 장을 앞발로 버티며

너덜너덜 노래하던 책

 

어머니가 병으로 쓰러지셨다

오른쪽 겨드랑이 아래로부터 온 통증이 죽음까지 내달았다

열심히 나를 뒤적거렸지만 슈나우저 한 권 찾아내지 못했다

일상의 책장에 꽂혀 멀뚱멀뚱, 어머니를 바라보기만 하던

나는 슈나우저만도 못한 파본破本이었다

 

*슈나우저(schnauzer) : 독일 원산 반려견의 한 품종

 

<시와소금> 2015 하반기 신인문학상 당선작

 

 


 

 

김은호 시인 / 투명인간

 

 

지퍼를 세게 올린다. 비뚤어진 감정이 목젖을 물어뜯는다.

 

점퍼 속에 오리 울음이 가득하다.

 

점퍼 하나 제대로 못 만드는 싸구려 방식을 향해 삼거리 편의점 불빛이 컹컹 짖는다. 찌그러진 냄비 속에서 오리의 꿈이 식어간다.

 

내가 기르던 오리들이 모두 객사했다. 비가 오면 공룡은 우산을 삼켜 버린다.

툭 하면 뒤통수치는 세상, 뛰어봐야 한통속 애인이 먹여주는 밥에서 공룡의 똥냄새가 난다.

 

세수할 때 콧구멍을 찌르는 새끼손가락, 약속 같은 것은 하지 마! 허기로 쌓아올린 벽이 쩍, 입 벌리면 죽은 시계나 던져줘라.

 

아스팔트 위에 오리들이 쏟아진다. 물음표에 부딪혀 죽은 어머니를 업고 빙빙 돈다.

넘어간 트럭 짐칸에서 붉은 달이 떠오른다.

 

눈물은 어디서부터 단단한 뼈가 되는지 내 중심은 왜 이렇게 물컹물컹한지 평생 뒤뚱거렸으나 어제가 떨어지지 않는다.

 

빌딩 높이로 쌓이는 어둠의 네모난 입들이 꽥꽥거린다.

 

 


 

 

김은호 시인 / 구름공동묘지

 

 

새가 사라졌다

유리창 속으로 끝없이 사라지는 새

나는 그것을 새가 깨졌다고 읽는다

 

오그라든 발이 제 마지막 울음을 움켜쥐고 있다

뭐라고 뭐라고 중얼거리며

허공에서 보낸 한철을 뱉어내는

 

죽은 새를 손에 들고 구름을 바라본다

이해할 수 없는 문장들 파닥거린다

 

물음표를 물고 사라지는

모든 눈 깜짝할 새를 위하여

구름에 새를 묻어 준다

노을의 피가 소복에 배어 나온다

 

구름 공동묘지에는

날개 없이 날아간 사람들의

발자국이 하얗게 덮여있다

 

이별을 오래 만지작거리면 구름이 된다

구름이 되지 않고는 건너갈 수 없는 슬픔이 있다

 

깨어지지 않으려고 부르는 노래,

직박구리 같은 새의 울음에서는

못으로 유리 긁는 소리가 난다

 

 


 

 

김은호 시인 / 산짐승 우는 소리를 듣는 저녁

 

 

산길을 내려오다

산짐승 우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어떤 짐승의 울음소리인지 몰랐지만

그것은 노을에 가장 어울리는 음악

또 어쩌면, 말 못할 서러움을

오래 삭힌 노래일 것도 같았습니다

 

목구멍 깊은 곳에서 샘솟듯

허공을 토해내는 소리에

저물던 산이 휘청거리고

구름은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나는 눈물 애호가는 아니지만

그 어떤 울음도 꺾지 않으렵니다

출렁이는 어깨 위에 조각배 같은

손 하나 얹혀 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울음소리 난 곳 돌아다보는 나를

숨어 바라볼지도 모르는 눈

그 샘물에 나를 씻고 싶었습니다

 

며칠 후,

숲에서 다시 그 소리 들렸습니다

내게 하소연하는 것 같기도

우는 법을 가르쳐주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산짐승 울음소리 뒤 저 바깥세상에는

누구의 손도 잡지 못하고 홀로

눈물의 강을 건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산 그림자 밟으며 봄날은 멀어져가고

울음을 잘 배우고 싶은 저녁입니다

 

 


 

 

김은호 시인 / 낙타, 산으로 가다

 

 

명지산* 기슭에 낙타 떼가 나타났습니다

산 전체가 한 마리 커다란 낙타로 옷 갈아입었습니다

낙타 빛깔로 물든 낙엽송들, 그 빛깔과 냄새, 부드러움이

촘촘히 잘 짜인 한 필의 카멜텍스입니다

 

낙엽송 고목을 쓸어안고 울던 가수 배호,

스물아홉에 죽음의 사막으로 간 그의

낙타 울음 같은 노래가 요즘 들어 자주 들려옵니다

아직도 그는 모래알을 씹으며

바위 같은 사랑을 찾아 헤매고 있겠지요

 

바스러진 내 나이를 바라보면

터벅터벅 모래 언덕을 오르고 있는 그가 보입니다

오래전 신기루에 부딪혀 죽은 내 뼈들이

가끔 발에 채이기도 합니다

 

낙타 눈처럼 슬픔에도 높은 연비가 있다면

나는 시간을 등짐 지고 어느 별까지 갈 수 있을까요?

별빛 내린 사막 어느 오아시스에서 잠들 수 있을까요?

 

낙타 등에 실린 노래들이 바람에 흔들립니다

오늘은 나도 쌍봉낙타 타고 가는 가수입니다

 

*명지산 : 경기도 가평군 북면에 있는 해발 1,267M의 산

 

 


 

 

김은호 시인 / 안부

 

 

아무도 오지 않았다

 

꽃송이마다 안부를 묻는 향기가

소인처럼 찍혀 있다

 

빗방울이 꽃의 등을 밀고 있다

봄을 배웅하는 이정표같은

키 큰 마거릿 꽃이

젖은 제 발목을 내려다본다

 

먼 곳에서 소리 없이 혼자

웃고 우는 꽃들에게

안부를 묻는다

 

 


 

김은호 시인

경남 진해(창원시)에서 출생. 한국 외대 스페인어과 졸업. 종합상사 파나마 주재원. 홍콩에서 무역업. 2015년 계간  《시와소금》으로 등단. 시집으로『슈나우저를 읽다』가 있음. 현재 한국 가톨릭문인회 회원으로 활동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