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호 시인 / 슈나우저*를 읽다
텃밭 가장자리를 곡괭이로 파서 열고 흰 무명천에 책을 싸서 묻는다 삽으로 흙을 뿌려 덮으며 흰머리멧새 울음소리도 몇 송이 얹혀준다 오랫동안 읽었던 부드럽고 따듯한 이야기들이 땅속으로 스며든다
사방팔방 무너져 내려 집에 쌀 팔 돈조차 없던 때 길에서 주워온 슈나우저 한 권
검고 부드러운 털로 덮인 표지에 반짝반짝 두 개의 별이 박힌 책 첫 장부터 끝까지 팔짝팔짝 뛰어다니며 풍성한 수염 출렁거리던 가끔 붉은 혀로 세상을 핥아주거나 컹컹 꾸짖을 줄도 아는 슈나우저는 따뜻한 난로가 부록으로 묶인 책이었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유쾌한 문장들 쏟아지고 우리 집 웃음소리 굴뚝처럼 높아갔다
책 독자 사이를 오가던 수많은 사연 잿빛으로 물든 날 '우리 함께 고통을 이겨냈어요' 이별의 장을 앞발로 버티며 너덜너덜 노래하던 책
어머니가 병으로 쓰러지셨다 오른쪽 겨드랑이 아래로부터 온 통증이 죽음까지 내달았다 열심히 나를 뒤적거렸지만 슈나우저 한 권 찾아내지 못했다 일상의 책장에 꽂혀 멀뚱멀뚱, 어머니를 바라보기만 하던 나는 슈나우저만도 못한 파본破本이었다
*슈나우저(schnauzer) : 독일 원산 반려견의 한 품종
<시와소금> 2015 하반기 신인문학상 당선작
김은호 시인 / 투명인간
지퍼를 세게 올린다. 비뚤어진 감정이 목젖을 물어뜯는다.
점퍼 속에 오리 울음이 가득하다.
점퍼 하나 제대로 못 만드는 싸구려 방식을 향해 삼거리 편의점 불빛이 컹컹 짖는다. 찌그러진 냄비 속에서 오리의 꿈이 식어간다.
내가 기르던 오리들이 모두 객사했다. 비가 오면 공룡은 우산을 삼켜 버린다. 툭 하면 뒤통수치는 세상, 뛰어봐야 한통속 애인이 먹여주는 밥에서 공룡의 똥냄새가 난다.
세수할 때 콧구멍을 찌르는 새끼손가락, 약속 같은 것은 하지 마! 허기로 쌓아올린 벽이 쩍, 입 벌리면 죽은 시계나 던져줘라.
아스팔트 위에 오리들이 쏟아진다. 물음표에 부딪혀 죽은 어머니를 업고 빙빙 돈다. 넘어간 트럭 짐칸에서 붉은 달이 떠오른다.
눈물은 어디서부터 단단한 뼈가 되는지 내 중심은 왜 이렇게 물컹물컹한지 평생 뒤뚱거렸으나 어제가 떨어지지 않는다.
빌딩 높이로 쌓이는 어둠의 네모난 입들이 꽥꽥거린다.
김은호 시인 / 구름공동묘지
새가 사라졌다 유리창 속으로 끝없이 사라지는 새 나는 그것을 새가 깨졌다고 읽는다
오그라든 발이 제 마지막 울음을 움켜쥐고 있다 뭐라고 뭐라고 중얼거리며 허공에서 보낸 한철을 뱉어내는
죽은 새를 손에 들고 구름을 바라본다 이해할 수 없는 문장들 파닥거린다
물음표를 물고 사라지는 모든 눈 깜짝할 새를 위하여 구름에 새를 묻어 준다 노을의 피가 소복에 배어 나온다
구름 공동묘지에는 날개 없이 날아간 사람들의 발자국이 하얗게 덮여있다
이별을 오래 만지작거리면 구름이 된다 구름이 되지 않고는 건너갈 수 없는 슬픔이 있다
깨어지지 않으려고 부르는 노래, 직박구리 같은 새의 울음에서는 못으로 유리 긁는 소리가 난다
김은호 시인 / 산짐승 우는 소리를 듣는 저녁
산길을 내려오다 산짐승 우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어떤 짐승의 울음소리인지 몰랐지만 그것은 노을에 가장 어울리는 음악 또 어쩌면, 말 못할 서러움을 오래 삭힌 노래일 것도 같았습니다
목구멍 깊은 곳에서 샘솟듯 허공을 토해내는 소리에 저물던 산이 휘청거리고 구름은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나는 눈물 애호가는 아니지만 그 어떤 울음도 꺾지 않으렵니다 출렁이는 어깨 위에 조각배 같은 손 하나 얹혀 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울음소리 난 곳 돌아다보는 나를 숨어 바라볼지도 모르는 눈 그 샘물에 나를 씻고 싶었습니다
며칠 후, 숲에서 다시 그 소리 들렸습니다 내게 하소연하는 것 같기도 우는 법을 가르쳐주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산짐승 울음소리 뒤 저 바깥세상에는 누구의 손도 잡지 못하고 홀로 눈물의 강을 건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산 그림자 밟으며 봄날은 멀어져가고 울음을 잘 배우고 싶은 저녁입니다
김은호 시인 / 낙타, 산으로 가다
명지산* 기슭에 낙타 떼가 나타났습니다 산 전체가 한 마리 커다란 낙타로 옷 갈아입었습니다 낙타 빛깔로 물든 낙엽송들, 그 빛깔과 냄새, 부드러움이 촘촘히 잘 짜인 한 필의 카멜텍스입니다
낙엽송 고목을 쓸어안고 울던 가수 배호, 스물아홉에 죽음의 사막으로 간 그의 낙타 울음 같은 노래가 요즘 들어 자주 들려옵니다 아직도 그는 모래알을 씹으며 바위 같은 사랑을 찾아 헤매고 있겠지요
바스러진 내 나이를 바라보면 터벅터벅 모래 언덕을 오르고 있는 그가 보입니다 오래전 신기루에 부딪혀 죽은 내 뼈들이 가끔 발에 채이기도 합니다
낙타 눈처럼 슬픔에도 높은 연비가 있다면 나는 시간을 등짐 지고 어느 별까지 갈 수 있을까요? 별빛 내린 사막 어느 오아시스에서 잠들 수 있을까요?
낙타 등에 실린 노래들이 바람에 흔들립니다 오늘은 나도 쌍봉낙타 타고 가는 가수입니다
*명지산 : 경기도 가평군 북면에 있는 해발 1,267M의 산
김은호 시인 / 안부
아무도 오지 않았다
꽃송이마다 안부를 묻는 향기가 소인처럼 찍혀 있다
빗방울이 꽃의 등을 밀고 있다 봄을 배웅하는 이정표같은 키 큰 마거릿 꽃이 젖은 제 발목을 내려다본다
먼 곳에서 소리 없이 혼자 웃고 우는 꽃들에게 안부를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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