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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승예 시인 / 수련이 걸린 미용실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11. 4.

이승예 시인 / 수련이 걸린 미용실

 

 

액자에 갇힌 채 벽에 걸린 수련은 몇 해째 꽃망울만 맺혔는데

벽지에선 날마다 모란이 피어나네

미용실의 풍경에는 관심 없이

바람은 밖으로만 불어서 꽃이 지지 않네

수련은 수련 색으로 창백한데

낮게 깔린 구름을 새 한 마리 지나와

속절없이 붉은 모란에 앉네

 

후드득 비가 오네

손님이 없어 미용실 여자는 졸다가 빗소리에 깜짝 졸음을 쫓네

그녀의 겨드랑이 아래로 브래지어가 보이네

그 모습에 움직이는 저 수련의 마음을

모란은 감정의 편향이라고 쑥덕이는가?

 

거울 속에 갇힌 미용실에 밤이 깊으면

그녀가 훌훌 브래지어를 벗고 잠에 드네

그 사이 액자에서 빠져나온 수련은

벽지 속으로 들어가 실컷 모란으로 피네

그러다 날 밝으면 다시 액자 속으로 돌아가는가?

 

거울 속 액자에서 꽃잎 한 장이 벌어지고 있네

연꽃인가요? 수련인가요? 그게 그건가요?

손님이 물으니 미용실 여자의 대답이 누리끼리하네

활짝 피어 봐야 알아요

모란일 수도 있겠죠?

 

 


 

 

이승예 시인 / 하루의 내부

 

 

뒤집어진 채 세탁이 된 양말을 널다가

시커먼 양말의 내부를 보았다

엉켜서 풀릴 수 없었던 마무리 부위가

감정의 음모 같은 뾰족한 발가락 끝에서

오래 견디다 구멍이 났다

 

생각해 보면

양말처럼 속 뒤집히던 일 수없이 많았다

십팔 년을 당겨 누런 웃음이나 흘리는 팽팽한 그녀 앞에서

주차된 그의 차 위로 벽돌 우박이

떨어졌어야 했다

 

오래 살던 집에 둔 채 팔아버린 감정이

불쑥 생각나는 것도 추억인가요?

양말의 내부는 차마 꺼내기 힘든 시

 

밖에서는 순두부 장수가 봄을 팔고 있다

양말을 버린다

 

바람이 분 후의 일인 듯

가로수 벚에서 겨우 꽃 한 송이 벙그는 소리에

가스 불 위 기름이 튀어 햇살과 만나더니

무지개 슨다

프라이 두 개가 식탁에 오르자 하루가 빽빽하다

물보다 빠르게 컵을 관통한 무지개를 마신다

양말에 난 구멍 같은 구내염이 일찍 죽은 오라버니처럼 아프다

 

양말의 내부를 알 리 없는 햇살이

버려진 양말에서 반짝이는 아침

 

아파트 화단에서는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꽃이 야생야생 피어나고 있다

아,

한 송이가 아니었구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침묵이 십자가 아래에서 빛나는데

허락도 없이 꽃을 야생으로 피워, 버린

햇살에 대한 용서까지 그곳에 두고 왔다

 

하루가 버려진 양말의 내부를 지나간다

 

—시집『나이스 데이』(2017. 6)에서

 

 


 

 

이승예 시인 / 뭉그러진 방향

 

 

그가 두고 간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보았다

 

손가락이 없어서 방향이 사라진 허공

바람이 잠잠한 건 중력과 상관없는 거다

고단한 시간이 마디를 지나간다

모든 방향은 손가락 끝으로 모이고

 

둥근 달이 달린 자전거를 탄다

페달을 밟을 때마다

함몰되었다 반복적으로 돋는 달은

기계에 끼어 뭉그러진 그의 손가락을 닮았다

 

마른나무 사이를 멍들며 지나와서

불규칙한 바람의 표정으로 빳빳하게 뻗은 검지손가락

 

자전거는 인류의 혁명이라고 주저 없이 말하며

달의 변방에서 더없이 펼쳐지는 그의 평원에

자기방식의 깃발을 꽂는다

 

손가락이 아린 날은 방향도 아려

뭉그러진 방향 너머 비로소 가능해진

깃발의 펄럭임

 

방향이 달려오는 쪽으로 그가 손가락을 뻗는다

 

계간 『발견』 2020년 여름호에서

 

 


 

 

이승예 시인 / 달 전화선

 

 

아들이 물에 빠져죽고 졸수(卒壽) 노모는 자리에 누웠다 한 이틀 들깨죽을 쒀서 찾아가도 영 수저를 들지 않는다모 아니면 도수를 쓴다아짐!인나서 죽 잡수믄 죽은 아들이랑 통화 시켜드리께기운도 없는 양반이 눈 속 지구를 움직여 나를 본다먼 소리여?아들은 죽었어 네요새는 세상이 좋아져서 죽은 사람이랑 통화가 된대요몽골 어떤 시인이 달 전화기를 만들었대요근데저쪽하고 이쪽이 하도 멀어서 목소리가 커야 헌대니께 언능 죽부터 잡숴요전화는 언제 와?저녁에 달뜨면 그때요과연 초이레 달이 떴다하늘이 돕는지 훼방 하는지맑은 바람 휑하니 지나가고 시름이 깊은 허공에 달은 전화기 모양으로 척 놓였다노인에게 가는 동안머릿속에서는날이 가고 달이 가고 온갖 거짓말 지나가고비나 올 것이지 천둥이나 칠 것이지그러다가 쌩뚱맞게 첫사랑 머시마도 횅 지나가고 흰 머리카락 쭈뼛 서고노인의 방문을 삐걱 열고 들여다보니문틈으로 달빛이 빈 죽 그릇 사이로 뻗쳤는데신음인지 잠꼬대인지 나도 가자, 나도 가자, 같이 가자 소리보다 얇은 눈물 한줄기가 달빛을 타고 귓속으로 흘러든다 모도 도도 아닌 졸수!

 

 


 

이승예 시인

1963년 순천에서 출생. 2015년 계간  <<발견>> 봄호로 등단. 시집으로 <나이스데이>, <언제 밥이나 한번 먹어요>. 현재 계간 <<발견>> 편집장. 제5회 김광협문학상 수상.